“아직도 삼성엔 안 터진 고름이…”
[현장]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4명의 ‘험난한’ 산재 신청

2008-04-29 오전 7:51:02

“사람이라면, 최소한 사람이라면 원수라 하더라도 병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수없는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에는 사람은 없고 기업만 있나 봅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소장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쏟아지는 각종 제보와 피해 당사자들이 호소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본 탓일까. 4명의 삼성반도체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하기까지 겪었던 사연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까.

▲ 지난 2005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지독한’ 항암 치료 후 현재 약물 치료를 받고 있는 김옥이 씨도 이날 산재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프레시안

마이크를 잡은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떨리는 것은 당사자들이 더 했다. 지난 2005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지독한’ 항암 치료 후 현재 약물 치료를 받고 있는 김옥이 씨는 “기차 타고 오는 내내 내가 산재 신청을 하면 삼성 관련 업체에서 일을 하는 남편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을까 걱정했다”며 “애 아빠에게 강압이나 압력이 없게 해달라”고 세 차례나 누군가를 향해 부탁했다.

백혈병 선고 9개월 만인 지난 2005년 7월 남편 황민웅 씨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정혜정 씨는 남편 대신 산재 신청을 하며 “삼성은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대기업이지만, 회사 뜻대로 말 잘 들으면 내 식구고 그 뜻에 어긋나면 가차 없는 곳이다. (이번 백혈병 사태도) 터지지 않은 고름 같다”고 털어놨다. 정 씨 본인도 10년 넘게 같은 공장에서 일한 삼성반도체 노동자였다.

이들이 산재 신청을 한 28일은 ‘세계 산재사망자 추모의 날’이었다. 이들은 이날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산재 신청서를 접수하며 기자 회견을 했다.

“도대체 피해자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라도 알아야 한다”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문제는 지난해 3월 기흥공장 3라인 디퓨전 공정에서 2년간 일했던 황유미 씨가 스물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故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씨가 딸뿐 아니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던 사람들 가운데 유독 백혈병으로 숨지거나 투병 중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뒤이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현재 18개 단체가 대책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관련 기사 : “삼성에 노조만 있었더라도 우리 딸이 그렇게…”, “삼성반도체 다니다 백혈병 얻어 죽었습니다”)

대책위는 관련 피해자의 제보 등을 통해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13명이 백혈병으로 사망했거나 현재 투병 중이고, 6명이 암 관련 질환을 얻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5일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 앞에서 열린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 집회’ 이후 대책위 측으로는 3~4건의 제보가 더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산재 신청을 낸 사람은 이들 가운데 4명이다. 이미 사망한 황민웅 씨와 이숙영 씨의 유족과 현재 투병 중인 박지연 씨와 김옥이 씨가 그들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황유미 씨의 유족들이 산재 보험 유족 급여 신청을 한 바 있다.

故 이숙영 씨는 황유미 씨와 동일한 공정인 3라인 3베이에서 일하다가 똑같은 시기에 백혈병을 얻어 목숨을 잃은 피해자다. 박지연 씨는 29일 골수이식수술을 앞두고 있어 노무사를 통해 산재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공유정옥 소장은 “삼성의 산재 은폐 시도를 벗기고 백혈병이 피해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재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청정 산업, 첨단 산업으로 미화돼 온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노동 건강권 확대에 기여하고자 한다”며 집단 산재 신청의 배경을 설명했다.

▲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가운데 이날 산재 신청을 낸 사람은 4명이다. 이미 사망한 황민웅 씨와 이숙영 씨의 유족들과 현재 투병 중인 박지연 씨와 김옥이 씨가 그들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황유미 씨의 유족들이 산재 보험 유족 급여 신청을 한 바 있다. ⓒ프레시안

13명이 백혈병, 6명이 암 피해자…”제보는 잇따른다”

다음은 대책위 측에서 밝힌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의 현황이다. 대책위는 백혈병 피해자 외에도 암 관련 피해자가 6명으로 드러났고 유산, 불임, 피부질환, 근골격계 질환, 자녀의 선천성 기형 및 질환에 대한 피해 제보들이 잇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 대책위 발족 당시 확인된 백혈병 피해자

1) 이상훈 (남) 기흥공장 설비 엔지니어 : 1997년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
2) 황민웅 (남) 기흥공장 설비 엔지니어 : 1974년 생. 1997년 10월 기흥공장 입사. 2004년 10월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 진단. 2005년 7월 사망.
3) 황유미 (여) 기흥공장 생산직(3라인 디퓨전 공정) : 2003년 입사. 2005년 6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2007년 3월 사망. 2007년 6월 산재보험 유족급여 신청.
4) 이숙영 (여) 기흥공장 생산직(3라인 디퓨전 공정) : 1994년 12월 입사. 2006년 6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2006년 8월 사망.
5-6) 사무관리직 2명 : 삼성반도체 회사에서 주장한 피해자로, 1명은 완치되어 근무 중, 1명은 사망.

■ 대책위 발족 이후 확인된 백혈병 피해자

7) 주교철 (남) 기흥공장 기술부 부장(디퓨전 공정 관리) : 1983년 입사. 2006년 2월경 구조조정으로 퇴사 후 삼성전기로 전적. 2006년 3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현재 투병 중.
8) 박지연 (여) 천안공장 생산직(검수 공정) : 2007년 9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현재 투병 중.
9) 성명 미상 (여) 기흥공장 생산직 : 2003년 9월 급성 백혈병 발병. 2004년 사망. 현재 대책위와 연락 두절된 상태.
10) 성명 미상 (여) 기흥공장 생산직 : 2001년 경 급성 백혈병 진단. 치료 후 낙향. 이숙영씨 동료.
11) 성명 미상 (여) 기흥공장 생산직 : 1995년 급성 백혈병 사망
12) 김옥이 (여) 천안공장 생산직 : 1991년 1월 입사. 1996년 퇴사. 2005년 급성 전골수성 백혈병 발병. 현재 투병 중.
13) 성명 미상 (여) 기흥공장 생산직 : 1999년 입사. 2008년 4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 기타 암 및 관련 사업장 피해자

1) 성명 미상 (남) 기흥공장 설비 엔지니어 : Wegener’s granulomatosis
2) 성명 미상 (남) 기흥공장 설비 엔지니어 : 흑색종
3) 성명 미상 (남) 기흥공장 연구원 : 1984년 입사. 2002년 경 중증 빈혈
4) 성명 미상 (여) 삼성전기 근무 : 작업 중 방사선 노출. 2007년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현재 투병 중.
5) 성명 미상 (여) 창원 삼성테크윈 : 약 3년간 생산라인 근무. 2005년 여름에 암 진단.
6) 성명 미상 (여) 부산 삼성 SDI : 약 2년간 근무. 2005년 8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대책위는 자발적 제보에만 의존하고 있어 정확한 피해자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대책위는 이날 기자 회견문을 통해 “백혈병 피해자의 규모는 얼마나 되며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인지 투명하고 철저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 삼성반도체 측은 “개인적인 질환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대책위는 “희귀질환인 백혈병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다”며 분명한 산재라고 맞서고 있다.

“삼성반도체, 피해자들 각종 수단으로 회유하고 있다”

대책위는 또 “삼성 측이 피해자들의 산재신청을 막기 위해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입을 틀어막으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택시 운전을 하는 故 황유미 씨의 부친 황상기 씨에게는 “위로금 얼마를 주면 산재 신청을 철회하겠냐”며 회사 측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온다는 것.

동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피해자를 압박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옛 동료들이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와 ‘정말 산재 신청 할거냐, 그러다 너만 더 피해본다’ 등의 회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대책위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 같은 대책위 측의 주장과 관련해 은 삼성반도체 홍보팀과의 전화 통화를 두 차례 시도했으나 “관련 담당자가 다른 업무로 인해 자리에 없다”고 밝혀 삼성반도체 측의 입장을 들을 수 없었다. 집단 산재신청 사태로 번지고 있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와 관련해 근로복지공단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여정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