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탓’하기 전에 산업재해부터 막아라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산재 손실, 파업 손실의 곱절 능가
2008-04-29 오후 4:02:54
지난 43년 동안 우리나라 산업 현장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수는 7만70명이다. 부상당한 노동자 수는 311만1856명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갖고 있는 산업재해 통계는 1964년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얼마나 다치고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비록 산업재해 통계가 시작된 것은 1964년부터지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산업재해 조사 자료를 집계 분석한 것은 1972년부터다. 1975년 3월에야 총리령으로 산업재해 조사 자료 보고 양식이 승인됐다.
통계청이 산업재해 통계를 일반통계로 승인한 것은 1977년이었다. 1992년에 산업재해 통계가 노동자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됐고, 2000년 7월에 이르러서야 1인 이상 사업장까지 통계 적용범위가 확대됐다. 1999년부터는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공단이 산업재해 관련 통계를 작성해오고 있다.
어쨌든 이 통계들에 따르면 지난 43년간 산업재해로 인한 사상자 수는 318만 명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다일까?
산재 사상자 수는 318만 명일까?
산재 통계는 산재보험 가입과 연동돼 집계되고 있다. 통계의 대상 노동자는 1964년 8만1798명에서 시작해 1974년 151만 명, 1984년 438만 명, 1994년 727만 명, 2004년 1047만 명, 2006년 1168만 명으로 확대돼 왔다. 하지만 2005년 현재 1인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체 수가 320만개 소이고 전체 노동자 수가 1514만 명임을 감안한다면 여전히 35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 통계에서 빠져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지난 40년 동안 산업재해 통계가 종업원 규모가 상대적으로 많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작성되어온 현실과 사실상 산업재해에 해당하나 법리상의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를 고려할 때, 그리고 행정적인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사업주가 고의로 신고하지 않고 은폐한 사례를 포함할 때 일터에서 일하다 죽거나 다친 노동자 수는 318만 명을 훨씬 넘을 것이다.
파업 손실의 수십 배가 넘는 산재 손실
2006년 노사분쟁에 따른 파업과 직장폐쇄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120만 일이었다. 반면, 같은 해 산업재해에 따른 노동손실일수는 7116만 일이었다. 4월 29일자에 따르면, 2007년 노사분쟁에 따른 노동손실일수는 53만 일인 반면 산업재해에 따른 노동손실일수는 6393만 일로 119배나 높았다.
▲ 노사분쟁·산업재해에 따른 노동손실일수 및 경제적 손실액 비교. 출처: 노동부 산하 한국노동연구원이 노동부 및 산업자원부 자료를 분석한 자료 재정리. ⓒ프레시안
관련된 금전적 손실도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산업재해가 노사분쟁의 10배를 넘어서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사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산업재해로 인해 죽은 사람은 2007년 하루에 6.59명, 한해 통틀어 2406명에 달했다.
보통 노사분쟁으로 인한 손실이 과대평가되고 산업재해로 인한 손실이 과소평가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산업재해의 규모와 피해는 훨씬 심각할 것이다.
‘세계 산업안전의 날’에도 ‘조용한’ 노동부
지난 4월 28일은 ‘세계 산업안전의 날’이자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었다. 1985년 4월 28일 캐나다노총(CLC)이 1914년 제정된 노동자보상보험법을 기념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은 캐나다,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1996년 국제노총(ICFTU)이 공식화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확산됐다. 유엔 산하의 노사정 3자 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는 2002년 이 날을 ‘세계 산업안전의 날’로 공식 선언했다.
올해 4월 28일 한국노총은 산업재해 희생자 위령탑이 있는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추모제를 개최했고, 4월을 ‘노동자 건강권 쟁취의 달’로 지정한 민주노총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산재노동자 추모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ILO는 “매년 산업재해로 220만 명이 죽고 2억7000만 명이 고통 받고 있다”며 “건강한 노동력이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예방하고 관련 보험과 보상을 줄임으로써 기업의 생산성과 국민경제 모두를 튼튼히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미국 노동부 산업안전청은 “오늘 우리는 일로 인해 다치거나 생명을 잃은 이들을 기억한다.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악의 산업재해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노동부는 보도자료 하나 내지 않고 이날을 보냈다.
흔히들 ‘민주화 세력’과 ‘근대화 세력’이 오늘의 한국을 건설했다고들 말한다. 이 용어를 그대로 빌리자면 노동자계급은 ‘민주화 세력’인 동시에 ‘근대화 세력’이다. ‘산업전사(産業戰士)’라는 말이 잘 말해주듯이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일터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였다. 사망자 7만과 부상자 311만은 44년에 걸친 노동자들의 전쟁 기록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지난 3월에 있었던 노동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산업재해 관련 정책은 ‘규제완화’에 밀려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대신 노동부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노동 관련 규제를 ‘국민이 보다 편리하게’ 개혁하기 위한 아이디어 공모 이벤트”를 4월 2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고 있다.
▲ 지난 4월 28일은 ‘세계 산업안전의 날’이자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악의 산업재해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노동부는 보도자료 하나 내지 않고 이날을 보냈다. ⓒ프레시안
‘친기업’ 정부에 신난 경총…노동자의 전쟁은 언제 끝날까
노동부의 이 이벤트를 예감한 듯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3월 27일 ‘규제개혁’을 건의했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유해·위험작업에 투입할 때 실시하는 안전보건 특별교육을 16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이고, △유해·위험물질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제출하는 공정안전보고서의 제출 대상을 줄이고, △위험인자에 노출되는 노동자에 대한 특수건강진단 주기를 늘리고,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지 않고 유해인자를 누락시킨 사용자에 대한 처벌 조항을 삭제하고, △사용자의 안전보건개선계획 수립 의무를 중대재해가 연간 2건 이상 발생한 사업장에서 연간 3건 이상 발생한 사업장으로 완화하고, △노사 동수로 구성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미의결 사항을 전문중재기관이 아닌 노사분쟁을 주로 처리하는 노동위원회의 책임으로 미루고,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 조사방법에서 노동자에 대한 증상설문조사를 폐지하고, △2008년 6월 30일까지 완료해야 하는 독성 화학물질의 분류·표시 및 물질안전보건자료의 작성·비치를 연기하는 것이 경총의 주된 요구다.
1985년 15만4930명으로 최대를 기록했던 산업재해로 인한 부상자 수는 이후 꾸준히 줄어 2006년에 3만9746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1990년 2000명대에 진입한 이래 2003년 2923명을 기록하는 등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친기업’ 정부와 ‘반(反)생명’ 사용자 사이의 정치적 동맹으로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사투는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노동자들의 전쟁은 언제나 끝날 것인가.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보내며 드는 생각이다.
윤효원/ICEM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