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갈수록 ‘진화’…사업장 건강관리는 ‘제자리걸음’

매일노동뉴스 김미영 기자

정종수 노동부차관은 지난 14일 매경안전환경연구원 초청간담회에서 “산업재해율을 낮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 평생 건강관리를 위한 예방적 건강증진체계 구축이 무엇보다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강조했다.
정 차관의 지적대로 노동자 건강관리, 다시 말해 산업보건서비스체계 구축은 중요한 문제다. 1년6개월 사이 15명의 노동자가 무더기로 사망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한국타이어 집단 돌연사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업장 건강관리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충분히 예방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타이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7명의 노동자 대다수는 고혈압·고지혈증·간질환 등을 앓고 있었고, 지속적인 건강관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용자는 이를 외면했고, 장시간노동과 고온 등 유해한 작업환경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을 사망자로 만들었다.

직업병은 갈수록 증가하는데

비단 한국타이어만의 문제는 아니다. 산재통계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4만1천460명의 노동자가 업무상질병에 걸렸고, 이 중 6천121명이 사망했다. 업무상질병자수는 2002년 5천417명에서 2006년 1만235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이 기간 뇌심혈관계질환으로 숨진 노동자는 3천541명으로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해 업무상질병자수는 더욱 늘어 1만1천472명에 달했다.
직업병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제조업의 경우 나노물질 같은 새로운 화학물질의 등장으로 새로운 직업병을 예고하고 있다. 전자·반도체분야에서도 발암물질 사용논란이 뜨겁다. 또 산업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이동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질환, 순환기계질환 등이 노동자를 위협하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 100명 중 15명은 질병을 가지고 있다. 2005년 25만5천여개 사업장 257만2천여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건강검진 결과 전체 노동자의 15.2%인 39만2천75명에게서 건강이상 증상이 발견됐다.
특히 뇌심혈관계질환 발병원인으로 지목된 순환기계질환(고혈압·고지혈증·당뇨) 유소견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통적인 난청·진폐 등 직업병 유소견율은 90년 0.22%(7천742명)에서 2005년 0.09%(2천380명)로 크게 줄었지만, 순환기질환 유소견율은 90년 0.81%(2만8천726명)에서 2005년 2.86%(60만628명)으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한국타이어와 같은 집단 돌연사 위험이 어느 사업장에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IMF 이후 건강관리, 기업 자율에 맡겨

전문가들은 97년 IMF 외환위기로 노동자 고용을 위협하는 불안요소가 증가한 반면에 기업활동규제완화에관한특별조치법 시행으로 산업보건규제가 대폭 완화돼 노동자 건강관리체계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임상혁 원진노동환경연구소장은 “뇌심혈관계질환 등 직업병 예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책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교대제를 개선하는 등의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면서도 “시급하게는 ‘공장 주치의’ 등 사업장 내 건강관리 시스템을 마련해 노동자들에 대한 1차적인 의료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이나 LG·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은 사업장 부설 병원이나 별도의 프로그램을 도입해 종업원의 건강관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 대다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1~2년에 한 번 하는 건강검진 외에는 산업보건서비스를 접할 기회가 없다. 기업활동규제완화특별법 시행으로 산업보건 규정이 대부분 기업자율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05년 11월 기준으로 사업주가 직접 산업보건의를 고용하고 있는 곳은 50인 이상 사업장 2만8천930개 가운데 84곳에 불과하다. 전체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나머지 26.2%는 환경관리기사 등이 겸직을 하면서 보건관리 업무까지 맡고 있다.

노동부, 개선안 마련에 나섰지만…

노동부도 사업장 건강관리체계의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다. 노동부는 지난 3월 “2012년까지 작업관련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를 30% 줄이겠다”며 ‘뇌심혈관계질환 예방 등 근로자 건강관리 방안’을 내놓았다.
방안에 따르면 내년부터 중소·영세사업장에 ‘사업장방문 간호사제’, 1천명 이상 대형사업장에는 ‘사업장 주치의 컨설팅제’가 도입된다. 또 건강검진체계를 실효성이 있게 개선하고 예방 중심의 사업장 지도감독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 지방노동청에 의사감독관 배치해 건강관리팀을 별도로 운영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예산 10% 절감을 앞세워 신규사업을 허용하고 있지 않아, 이 사업은 추진단계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당장 내년부터 뇌심혈관계질환 집중 발생사업장인 건물종합관리업과 자동차여객운수업·건설업 등 55만개 사업장에 산업간호사 500명을 투입한다는 계획이지만 아직까지 예산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인한 경제적 손실액은 16조원에 이른다. 뇌심혈관계질환으로 인한 손실액만 1조5천억원에 가까운 실정이다. 노동계는 “이명박 정부가 자칫 노동자 건강관리마저 비용과 규제의 시각에서 접근할 경우 보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