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이 책은 인지생물학에 대한 내 작업의 역사에 대해 베른하르트 푀르크젠과 나눈 다소 긴 대담을 싣고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미 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 이상으로 이 짧은 서문에서 더 이야기할 것이 없다. 나는 이 책이 전하고 있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체험하고 살아 왔는지에 대해 몇 가지를 회고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인지생물학과 사랑의 생물학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었을 당시에 내가 살아냈던 세 개의 기본적인 전환점들에 대해 회고해 볼 것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세 전환점들이 나에게 일어난 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세 가지 평범한 특징들이 이론적 체계에 대해서 함축하는 바를 내가 깨달아 가게 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것들은 물음들의 상관적인 본성, 우리가 실수를 저지른다는 평범한 사실, 그리고 자연적 현상들의 반복성에 대한 우리의 정상적인 일상적 믿음이다. 물론 나는 물음들이, 물음을 던지는 사람과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맺는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내가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자연적 과정들의 규칙성을 신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깨달음이 확장되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의 그와 같은 평범한 상황들과 과정들이 우리의 ‘함들’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함축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행동한 결과들을 내가 의식하게 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물음들과 대답들 만일 우리가 물음들과 대답들의 상관적 본성에 대해 살펴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자기가 던진 물음에 대한 어떤 대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는 대답을 자기 자신이 보기에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이 경청하는 가운데 결정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 물음이 무엇이든지 간에, 대답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대답을 타당한 대답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 물음-대답 관계의 구성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이것이 물음들과 대답들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제공된 무언가가 받아들여지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제공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아들여진 것의 진리, 가치, 또는 타당성을 결정한다. 물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실상 잘 알려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그것이 정말로 사실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하는 것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즉,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며, 어떤 것도 그 자체로 가치로울 수 없으며, 타당하거나 수용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더욱이 우리가 만일 내가 위에서 말한 바의 함축들을 받아들인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제기된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과학자가 자연에 물음을 던지고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어떤 대답을 얻을 때, 그렇게 해서 얻은 대답의 타당성을, 실험이나 관찰의 결과들을 수용 또는 거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사용하는 기준을 선택함으로써,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을까?
관찰자 본인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물음과 대답 관계의 구성적인 특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위에서 제기된 물음들이 그와 같은 것을 고찰함으로써 대답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어떻게든 실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진술들이나 설명들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실수들을 통해 배운다고 말하면서도,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타자들―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예컨대 정치가들, 어린이들, 과학자들, 부모들, 철학자들―을 맹비난한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우리는 실수를 우리의 행위에서의 심각한 실패로 간주한다. 이 실패가, 우리가 그렇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볼 수밖에 없는 실재 앞에서의 범죄적 맹목성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
만일 실수가 저질러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자문해 본다면, 우리는 실수가 하나의 행위임을, 즉 어떤 행위가 이루어진 순간에, 그리고 그 타당성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또 다른 행위와 관련해서 나중에 실수로 평가 절하되는 순간에 그것의 타당성을 정직하게 수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의 행위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면, 실수는 실수 그 자체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며, 실재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실수는 그것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우리가 연속적인 계기들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들을 비교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 때에는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실수는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실수는 나중에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하고 있던 어떤 것이 그것을 하는 순간에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실수는 잘못이 아니다. 실수는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의 실패도 아니다. 실수는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실수는 우리의 ‘함들’의 과정에 대한 성찰로서 발생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는’ 순간에, 우리가 나중에 그와 같은 ‘함’을 (또한 우리가 이 또 다른 ‘함’을 하나의 실수로 간주하게 될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실수로 간주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아니면 사태가 어떠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나중에 그러한 주장이 실수였다고 생각하게 될지를 모른다면 말이다. 왜 누군가 실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수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수가 현재에는 발생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실수가 나중에 실수라고 불리게 될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 발생하고, 성찰이라는 사후적 행동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우리가 하는 것’을 ‘하는’ 그 순간에는, 그것을 나중에 실수라고 부르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 받아들여지고 나서야 대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의 반복성을 신뢰하기 우리는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반복적이라는 점을 신뢰하면서, 적절한 조건들이 실현된다면 예전에 작동했던 것이 다시 작동할 것임을 신뢰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움직인다. 이러한 신뢰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컨대 요리, 원예, 과학, 과학기술이나 철학―의 토대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이것을 알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우리가 만드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사물들이 그것들이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 작동한다는 점을 알고 있고, 또 그렇다고 믿는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에 이것에 대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자연과 인공적인 “사물들”이 그것들이 만들어진 방식에 따라 작동하는 한 그것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것들에 작용하는 것에 의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며,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들 안에서 변화들―만들어지는 방법에 의해 결정되어 발생하는 변화들―을 유발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생명체계로서의 우리도 예외는 아니며, 분자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다른 모든 분자적 존재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의해 우리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적 작용체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외적 작용체들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들이 단지 우리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는 변화들을 우리 안에서 유발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았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보거나 듣고, 또는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면, 나에게 외부적인 어떤 것이 어떻게 그것 자체에 대해 무엇인가를 내게 말해 줄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우리 외부의 어떤 것도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면서 대답되어야 한다.
내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이러한 특징들이 지니고 있는 광범한 함축들을 점차로 깨닫게 됨에 따라 생물학적 과정들에 대한 나의 이해는 확대되었고 변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구분했던 모든 것을 발생시킨 과정들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고, 사물들이 어떠한가[본질]를 묻는 대신에 그것들을 발생시킨 과정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으며, 내가 타당하다고 간주했던 대답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용했던 기준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책은 물음의 변화에 대한 역사이다. 즉,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어떤 것이란 내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나는 어떤 기준을 사용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행하는 역사이다.
성찰들 이 서문에서 나는 내 작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의 토대들에 대해 성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 내가 직업적인 철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신념들의 토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는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토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철학적 성찰을 한다. 또한 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어떤 체험을 발생시키게 될 하나의 과정을 제안한다면(그 과정이 작동하는 결과로서 체험이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그가 과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또한 어떤 철학적 성찰들에 대한 역사이자, 그러한 성찰들로부터 발생한 물음들에 대한 과학적 대답들의 역사이다.
이와 같이 나는 이 책에서 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선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움베르또 마뚜라나 2004년 4월 칠레의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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