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운동의 희망찾기]
1. 진화하는 대중, 퇴화하는 대중운동
2006-08-21ㅣ박세길

진화하는 대중, 퇴화하는 대중운동

박세길/새사연 부원장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일이 있다. 어쩌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심정일 것이다. 2004년 12월 서울 여의도에서는 세계사에 그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처절한 투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국민단식농성이었다. 26일간에 걸친 단식농성에 줄잡아 2천 5백 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그중에서는 26일 전 기간에 걸쳐 참여한 사람도 수백 명이 있었다.

단식농성단이 최대 규모에 이르렀을 때에는 1천 명을 넘기도 하였다. 여의도 광장 한 켠에는 1천여 명의 단식농성단이 머무는 대형 천막이 줄을 이었는데 그 위용이 참으로 대단하였다. 마치 대부대가 진을 친듯했다.

단식농성기간에는 정상적인 사람들조차 수행하기 힘든 투쟁이 진행되었다. 국회의장과 여당 원내대표를 압박하기 위해 정읍과 안산에 여러 차례 원정 투쟁을 가기도 하였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날 열린우리당 당사 앞에서 철야 노숙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국회의장 직권 상정을 요구하며 국회의장 공관 앞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새벽 혹은 밤늦게 연좌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1주일 내내 진행했다. 나는 그 때마다 내 평생 가장 지독한 추위로 인해 몸서리쳐야 했다.

단식 농성 23일째,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 진입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국회앞 도로는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짓이겨지면서 비명소리가 낭자했고 곳곳에서 시체 아닌 시체가 나뒹굴어져 있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으로 돌변하였다. 그렇게 단식농성투쟁은 24일째 접어들었다. 정기국회는 불과 이틀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가 물 건너가는 듯한 비관적 분위기가 조성되던 마지막 순간에 결국 단식농성단 전원은 물과 소금마저 끊은 극한투쟁을 선택하였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부에서 완강한 반대가 있었고 마지막 선택을 발표하는 집회장이 일순간에 비명과 울음소리로 범벅이 되었으나 그대로 결행하였다.   

하지만 정치권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국민단식농성단과 연대투쟁을 전개했던 일부 정치권이 최선을 다했지만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 소식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2004년 12월 31일은 허망하게 지나갔고 정기 국회 또한 막을 내리고 말았다. 4.15총선에 의해 원내 과반수를 점한 열리우리당이 자신이 당론으로 정했던 국가보안법 폐지 약속을 끝내 저버리는 순간이었다. 슬픈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노무현정부와 열리우리당은 급격한 몰락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촐한 해산식을 마친 후 농성단은 기나긴 투쟁을 뒤로 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람들은 감히 당시 투쟁을 평가하려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애써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는지, 투쟁의 의미를 애써 높이 살려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역사에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알게 모르게 많은 국민들이 투쟁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당시 투쟁으로 인해 국가보안법이 맥을 추지 못할 만큼 타격을 받지 않았는가 등등이었다. 그러나 나의 최종 결론은 투쟁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결론에 대해 그 어떤 양보나 타협도 하고 싶지 않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투쟁은 실패했다! 그렇게 결론내리는 것만이 투쟁의 의의를 살리는 그나마 최선의 길이다. 그것은 사력을 다해 투쟁을 전개했던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역설적이게도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농성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적당히 평가하고 적당히 미화하게 되면 그렇고 그런 투쟁의 하나로 결코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모독이다.

여의도에서의 투쟁은 ‘섬’이었다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폐지 단식농성투쟁의 주된 공간은 서울 여의도였다. 여의도는 한강에 있는 섬이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 섬 위에서 전개되었던 투쟁 역시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섬으로 존재했었다.

솔직히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갈등과 고통 또한 가볍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힘겨운 것은 실패의 원인과 교훈을 제대로 밝혀내는 것이었다. 혼동과 번민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복잡한 문제의 결론이 으레 그렇듯이 이번의 결론 역시 매우 단순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대중투쟁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체제다. 분단을 영속화하고 사상을 억압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존립 근거가 되어 왔던 체제의 법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국가보안법을 두들겨 부수려면 적어도 수만 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어떤 형태로든지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고작 2천 5백 명이라니! 중간 중간에 있었던 집회에 참여한 사람을 모두 합친다 해도 결코 1만 명을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국가보안법 투쟁 행렬은 다수 국민의 입장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섬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만 그 섬이 뜨겁게 불타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섬은 아무리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도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 않는다. 사람들은 멀찌감치서 구경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투쟁은 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대중투쟁의 관점을 가지려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른바 ‘운동권’ 입장에서 대중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대중의 입장에서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응시해보기로 하였다.

현실의 대중은 엄청난 진화를 거듭했건만…

대중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최근에서 와서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혁명 당시의 대중과 21세기 한국의 대중은 질적으로 다르다. 나아가 1980년대 대중과 2000년대 대중 또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대중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독자적으로 정보를 획득할 길도 없었고 그것을 해석하고 가공하여 전파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기에 전위라는 이름의 소수 엘리트들이 모든 것을 대행해야 했고 일방적으로 이끌고 가야 했다. 소련 체제는 그로부터 출발했고 그런 점에서 본원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인민의 국가 소련은 자본주의 사회 이상으로 강력한 엘리트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중은 어떠한가. 우선 간단한 수치 하나가 그간에 일어난 질적인 변화를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2006년 올해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81%를 넘어섰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중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적절할 정도까지 된 것이다. 모두가 엘리트가 될 잠재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두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1980년대와 지금의 대중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 관계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보편적이었다. 진보적인 학생운동조차 철저하게 선후배간의 위계질서에 의해 움직였다. 정보의 흐름 또한 일방적이었다.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위로 보고하고 아래로 지시하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 정보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의 급속한 보급은 이 지점에서 혁명적 변화를 야기하였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공간은 누구나 쉽게 정보에 접근하여 정보를 가공하고 전파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그 결과 정보는 수평적이고 쌍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으며 그에 맞게 사회적 관계 또한 수직적 관계 중심에서 수평적 관계 중심으로 질적으로 전환하였다.

이 모든 변화의 결과를 몇 가지로 요약해 보자. 첫 번째 변화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대중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엄청 똑똑해졌다는 점이다. 높은 학력과 풍부한 역사적 경험, 정보 접근의 용이함 등이 그렇게 만들었다. 198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말끝마다 ‘난 무식해서 그런 소리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유식한 소리 집어치워라!’는 말이 늘상 붙어 다녔다. 그러니 지금은 180도 바뀌었다. 요즘 사람들 입에 붙어 다니는 말은 ‘나도 그 정도는 아니까 함부로 까불지 마라!’이다. 혹시 ‘무식한 대중’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다면 당장 버리는 것이 좋다.

두 번째 변화의 지점으로 네트워크 시대의 개막을 들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네트워크는 인류 사회가 도달한 가장 진보적인 사회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네트워크는 간단히 요약하면 ‘모두가 중심이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말한다.

세 번째는 앞서 첫 번째 두 번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진정으로 주인이 되고 싶어가는 경향이 매우 강해졌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주적 지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1980년대까지 노동자들의 보편적 요구는 보다 적은 시간에 보다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보다 편하게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 나온 신세대 노동자들은 돈을 조금 적게 받고 일이 좀더 고되더라도 남의 눈치 받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에 관해 대학 강좌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아도 대답이 거의 일치했다. 

자발적 대중운동은 대중토론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온라인 공간의 등장으로 대중적 토론의 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매일 수많은 이슈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토론되고 그중 많은 경우는 여론으로 발전하면서 오프라인의 행동을 촉발시키게 된다.

우리는 앙마라는 네티즌의 호소문이 일거에 효순 미선을 추모하는 거대한 촛불행렬을 만들어낸 것을 기억한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위협이 가해지고 있던 무렵 루키라는 네티즌이 ‘더 이상 국민을 협박하지 말라’는 이름의 카페를 개설, 18만 명의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이후 탄핵역풍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의 토론은 여러 가지 약점과 부작용도 있지만 모두가 대등한 입장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강점이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고자 하는 현재 한국 국민의 입맛에 딱 맞는다. 그래서 어느새 온라인에서의 토론이 차고 넘쳐흘러서 오프라인에서의 행동으로 발전하는 것은 대중이 움직이는 일반적 패턴이 되었다.

그런데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어떠했는가. 매우 고통스런 이야기이지만 온라인에서의 토론은 전무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서울 여의도라는 오프라인 공간은 뜨거웠지만 그를 둘러싼 온라인 공간은 줄곧 냉랭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투쟁은 사전에 충분한 상의 없이 잘난 인간들 몇이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결정하고 알아서 치고나간 꼴이다. 이럴 때 돌아오는 반응은 뻔하다.‘잘난 니들끼리 잘해 봐라!’이다. 야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입장 바꿔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여 치열하기 짝이 없었던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농성이 하나의 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의 교훈을 되씹으면서 다시금 근본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온라인 게릴라가 필요한 시대

본래 대중성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것. 대중을 움직이는 것. 대중을 주체로 세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로 말하면 연예인들 이상 탁월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며 두 번째로 말하면 과거 김영삼 김대중 씨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대중운동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올바른 대중운동은 대중을 주인으로 모시고 대중과 함께 상의하고 대중과 손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중은 스스로가 중심이고 주인이고 주체이다. 처음부터 함께 상의하고 토론하지 않는 한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당한 주체성의 발로이기도 하다.

광범위한 대중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온라인 인 것은 이미 앞서 확인했다. 오늘날의 정치전은 여론전을 기본으로 한다. 여론에서 우위를 점하지 않는 한 절대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여론전에서 온라인 공간이 갖는 가공할 힘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유능한 네티즌 1천 명이 온라인을 휘젓고 다니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 진보진영은 그럴만한 인적 자원과 조직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히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여전히 일부 IT전문가들의 기능적 활동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온라인 공간에서의 여론전도 진보가 보수에 밀리는 형국이다.

책임있는 한 당사자로서 말하기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현실의 대중은 엄청난 진화를 이루었는데 대중운동은 퇴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투쟁 준비는 대체로 일정 박고, 동원 지침 내리고, 집회 연사 정하고, 행진 코스 정하는 것 정도로 습성화되어 있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 조직대중으로 한정되어 있다. 집회 틀 역시 어디 가든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 집회에 참여하고 감동을 받았다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1주일에 몇 차례씩 떨어지는 동원령에도 군소리 없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놀라운 헌신성이 그나마 투쟁의 맥을 이어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달라져야 한다. 광범위한 대중이 당사자가 되어 갑론을박하면서 온라인 공간이 뜨겁게 달구어져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훌륭한 전사는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양성된다. 지금이야말로 온라인 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온라인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 절실하다. 과거에는 산악게릴라가 필요했다면 지금은 온라인 게릴라가 필요한 시대이다.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면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내 쓰린 가슴을 억제해야 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면서 싸웠던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농성투쟁을 감히 실패로 규정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어 속내를 드러내자면 내가 진정 꿈꾸는 것은 투쟁의 화려한 부활이다. 투쟁 대열에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가 절치부심하면서 저마다의 현장에서 열심히 미래를 일구어 왔다.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을 되씹으면서 새로운 모색을 했을 것이고 새로운 기법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훨씬 능숙하고 강인한 전사들로 자라났을 것으로 확신한다. 결국 역사는 사람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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