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한국산업안전공단의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의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에 대한 반올림의 입장

“애써 진실을 가리려는 의도로 점철된 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다”

2008년 12월 30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반올림은 2007년부터 정부 기관의 책임있는 역학조사의 필요성을 주장해왔으며, 역학조사 시행이 결정된 이후에는 제보를 통해 알게 된 피해자들과 반도체 공장 환경에 대한 정보들을 최대한 제공하여 역학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쏟아왔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 피해 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하여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여달라는 요구는 단 한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최소한 역학조사 결과와 결론을 확정하기 전에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만이라도 밟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또한 그런 전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거부당했다.

마침내 12월 29일, 한국산업안전공단(이하 공단)은 지난 1년 동안 수행해온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의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단은 반도체 사업장의 고용보험자료와 인사자료를 통해 각각 16만 명, 10만 명 정도의 대상자를 구성하고 이들 중 림프조혈기계 암을 찾아 일반인구집단과 비교하였다. 그동안 반올림이 우려하고 제기해온 한계와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담겨진 방식이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일부 중요한 결과들이 밝혀진 것은 천만 다행이지만, 정작 공단이 작성하여 배포한 보고서와 보도자료는 그 중요성조차 축소하고 감추는데 급급하여 우리는 경악을 넘어 분노를 금할 길 없다.

문제점 1. 고위험 집단의 존재를 통계로 뭉뚱그렸다

공단은 조사 대상자 전체를 분모로 계산한 발생률이 전체 인구의 발생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지 낮은지에 대한 결과만을 발표하였다. 가령 고용보험자료상 166,794명 중 62명의 림프조혈기계 암 환자를 발견했고, 삼성반도체의 경우 자료가 확보된 52,315명 중에서 찾아낸 림프조혈기계 암 환자 수는 19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계산법은 실제 암 위험이 높은 집단의 문제를 희석시킬 수 있다. 일찍이 미국과 영국에서도 기업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수행된 연구들이 진실을 축소 은폐하기 위하여 이런 방식을 사용하여 피해자들과 양식있는 전문가들로부터 비난받은 일도 있다. 반올림 역시 공단이 이런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수차례 밝힌 바 있다.

예를 들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의 급성 백혈병 발병자들은 모두 1, 2, 3라인 출신으로, 이 라인들은 수동 작업이 많고 설비가 오래되어 누출사고가 잦기 때문에 일명 “사고 라인”이라고 불리던 곳들이다. 3라인 디퓨전 공정에서 2인 1조로 일하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와 고 이숙영씨를 비롯하여, 2라인 에칭공정에서 일하다 발병한 김00씨, 1라인 설비엔지니어였다가 사망한 고 황민웅씨, 1~3라인 공정엔지니어 출신으로 현재 투병 중인 주00씨 등, 반올림이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5명의 백혈병 환자가 존재한다. 5만명이 넘는 삼성반도체 전체 노동자 중에서 15개 생산 라인에서 일한 노동자들, 그 중 특히 위험한 1~3라인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생각해보라. 1~3라인 근무자들 중 5명의 발생률을 구하면 삼성반도체 전체 5만여명 중 19명의 발생률보다 훨씬 높게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공단은 왜 고위험 집단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고 전체 발생률로 뭉뚱그려 발표하였는가? 발표회 자리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이 구두로 밝힌 이유는 ‘발견된 환자들에서 별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없어서’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의 면담과 자료 제출, 기자회견 등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제공했던 고위험 집단에 대한 정보는 보고서에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어찌하여 공단은 당사자들이 제공한 정보를 공식적인 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한편, 공단의 보고서에서는 고위험 집단의 문제를 통계로 뭉뚱그린 이유가 ‘세부 공정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라고 한다. 아무 공장이나 들어가보라. 라인별로 월별, 주별, 일별, 심지어 시간대별 출퇴근 현황, 생산량 현황, 불량 현황 등을 기록하지 않는 공장이 있는가. 노동자의 소속과 직무는 모든 사업장 인사 기록의 핵심이다. 이 정도의 자료조차 없었다는 말은 공단이 자료를 확보할 의지가 부족했거나, 회사가 상세한 자료 제공을 거부했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점 2. 건강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를 고려하지 않았다

노동자 집단의 건강 수준에 대한 역학조사들의 결과는 종종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건강하다고 나오곤 한다. 대상 사업장이 건강에 이로운 환경이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취업 단계에서 좀더 건강한 이들이 입사하는데다가 근무 중에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 퇴사나 이직을 통해 그 현장을 떠나기 때문에 결국 건강한 노동자들만이 남게 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를 ‘건강 노동자 효과’라고 부른다. 가령 이번 역학조사에서 모든 원인을 망라한 전체 사망비가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남성이 0.53, 여성이 0.68로 나타난 이유 중 하나는 건강 노동자 효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건강 노동자 효과는 보건 통계와 역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는 건강에 유해한 노동환경이지만 노동자들의 건강은 오히려 일반 인구 집단보다 더 낫게 조사되어 자칫 노동환경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올림은 실제로 반도체 공장을 오래 다니지 못하고 퇴사한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건강 노동자 효과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뿌리치고 퇴사한 이유는 거의 두통, 코피, 실신, 하혈, 불임, 피부병 등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공단조차 29일 발표회 자리에서 ‘비교 집단으로 삼을 만한 건강한 근로자들에 대한 자료가 없어 일반 인구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분명 이 연구의 한계다’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허공에 흩어지면 그만일 뿐이다. ‘건강 노동자 효과를 감안하지 못한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질병의 위험도가 이번 조사에서 낮게 나타났다고 하여 그 질병의 실제 위험이 낮으리라고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된다’라는 최소한의 주의조차 공식적인 보고서에서는 단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문제점 3. 백혈병 위험의 축소 왜곡을 조장하였다

온갖 연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림프조혈기계 암 중에서 비호지킨림프종의 위험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암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반도체 산업 현장에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혈병과 림프종은 모두 ‘조혈모세포’에서 기원하는 암이다. 백혈병만 일으키는 발암물질이나 림프종만 일으키는 발암물질이 따로 있지 않으며, 골수를 표적기관으로 하는 발암물질이라면 백혈병이나 림프종 모두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림프종의 위험이 명확히 높게 나왔다는 사실은 백혈병을 포함한 림프조혈기계 발암물질이 반도체 산업 현장에 존재할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는 발표회 자리에서 공단 측에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한 사실이다.

“림프조혈기계 암이란 제일 큰 덩어리이고, 그 안에 림프종과 백혈병이 들어간다. 백혈병과 림프종은 그 근원이 조혈모세포의 분화가 잘 안되서 생기는 질환이기 때문에 두 질환을 정확히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 조사에서) 두 질환을 구분해서도 보고 림프조혈기계 암으로 묶어서도 보았던 것이다.”(박정선 직업병 연구센터 소장)

“림프와 혈액은 조혈모세포라는 출발점이 똑같다.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느냐에 따라 림프종이 생길 수도 있고 백혈병이 생길 수도 있다.” (박두용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

그러나 공단은 정작 중요한 보도자료와 보고서에는 이러한 설명과 해석을 전혀 담지 않았다. 그 결과 수많은 언론들이 조사 결과를 오해하여 ‘림프종 위험은 높으나 백혈병은 괜찮다’라는 틀린 기사들을 보도하기에 바빴다. 이런 보도들 중에는 ‘백혈병이 작업환경과 관련되어있다는 주장은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라는 식의 심각한 왜곡에까지 이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결과 보도의 책임이 분명히 공단에 있다고 본다. 의학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누가 림프종과 백혈병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질환이며 같은 뿌리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오해가 불을 보듯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공단은 보고서나 보도자료 그 어디에도 문자화된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한편, 공단이 내놓은 보고서와 보도자료는 엄연히 백혈병 위험을 시사하는 내용조차 그 의미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다. 보고서 요약본의 결론 부분을 보자.

“여성의 백혈병 위험도 분석 결과…, 인사자료 코호트에서 표준화사망비는 1.48 (95% 신뢰구간 0.54 – 3.22), 표준화암등록비는 1.31 (95% 신뢰구간 0.57 – 2.59)으로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약간 높았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에서 백혈병 사망 위험이 1.48배, 발생 위험이 1.31배 높게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높았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라고 일축되어서는 안되는 의미있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백혈병이나 림프종은 모두 발생률이 지극히 낮은 질환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역학조사처럼 어느 집단에 위험요인이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시작 단계의 연구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약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

공단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백혈병 위험에 대한 의미 부여를 애써 회피하고 축소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드러난 사실조차 감추기에 급급한 보고서를 인정할 수 없다

고위험 집단의 존재를 전체 통계로 뭉뚱그려 숨기고, 결과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건강 노동자 효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림프종과 백혈병이 다른 질환인 것처럼 표현해서 백혈병의 위험이 적어 보이도록 표현하기… 이처럼 드러난 위험조차 축소하고 감추기에 급급한 보고서를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무책임하고 몰상식적인 수준의 보고서와 보도자료로 인하여 일부 언론은 이미 ‘반도체 산업에서 백혈병 위험이 높지 않음이 확인되었다’라는 둥, ‘오히려 일반 인구 집단보다 더 안전하다’라는 둥, 과학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선정적인 문구로 진실을 왜곡하고 나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왜곡된 보도로 진실이 잘못 알려질 우려에 대해 역학조사 결과 발표회 직후 공단과의 면담을 통해 강력히 항의

하였다. 그러나 공단의 답변은 ‘그런 것까지 우리더러 막으라는 거냐, 그건 불가능하다’라는 무책임한 말 뿐이었다.

허나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보고서나 논문을 쓸 때, 자신의 연구 결과가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결론과 토론 부분을 작성한다. 그에 비해 공단이 내놓은 이번 보고서에는 결과를 해석할 때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안내, 최소한의 해석 오류를 막기 위한 설명은 전혀 담겨있지 않다.

공단은 발표회를 통해 이번 조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조사이고, 이제 첫 걸음을 떼었으며 워낙 드문 질병이라 자료가 좀 더 축적된 10년 이후라면 좀더 의미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10년 이후에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지금 당장 고통 받는 피해가족들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조사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면 산재인정 이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사하면 될 일이다.

공단은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그 원인을 속시원히 알 수 있도록, 그리고 미래의 또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길을 열어 주는 조사를 해야 한다. 진실을 파헤치지 않고 파묻는 조사, 반도체 노동자들이 아니라 사업주들이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도록 면죄부를 주는 조사는 인정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산업재해의 승인여부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최종판정하지만 판정의 근거를 산업안전공단의 역학조사에 두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과연 산업안전공단은 자신들이 무책임하게 세상에 내놓은, 위험천만한 해석이 난무하는 통계수치로 반도체 노동자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

반올림은 산업안전공단에게 앞에서 지적한 역학조사 결과 보고서의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명확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 결론을 보고서에 기재하여 2009년 1월 예정인 역학조사 평가위원회를 통해 재심의할 것을 요구한다.

2008. 12. 30.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