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으로 팔이 잘려나갈 위험에 처해도…”
[인권오름] 비정규직, 건강 상태도 최악
2008-10-23 오후 2:36:36
영화 에서 주인공 ‘지미 B-래빗 스미스 주니어'(에미넴)에게 공장 일은 오직 생계만을 위한 일이다. 그의 꿈은 래퍼. 그에게 고된 일상의 탈출구는 힙합 랩이 전부다. 디트로이트의 슬럼가에 사는 대부분의 흑인들은 주인공처럼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노동을 한다.
그들의 노동은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노동’에 비유될 만하다.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노동은 단순 반복적으로 지겨움의 무한반복이며,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일한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심장과 간을 독수리에게 갉아 먹힐 때나 느낄 수 있는 고통일 것이다.
▲ 영화 의 한 장면. 주인공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한다.
또 그들에게 꿈, 즉 자아실현은 노동과 분리된 그 무엇이다. 이들에게 장밋빛 미래란 힙합을 통해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노동은 그 강도에 비해 돈을 많이 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동으로 미래에 투자할 수 없는 구조. 이들은 현재의 노동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맞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조차 꿈꾸지 못하기에, 노동의 고통은 더욱 쓰게 느껴진다.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거의 이렇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마치 바다 깊은 곳, 가장 밑바닥에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삶의 고통이 더욱 쓰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들이 건강하기라도 하면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들지만, 현실은 그 반대라는 점이다. 고된 일상은 더욱 건장한 체력을 요구하지만, 통계적으로 직종에 상관없이 비정규직일수록 노동자의 건강은 더 나쁘다.
통계청이 지난 3월 실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858만 명으로 임금노동자의 53.6%이며 정규직은 741만 명이다.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의 건강권은 비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닌 전 국민의 건강권이기도 하다.
‘비정규직-빈곤-육체적·정신적 건강 악화’의 악순환의 고리
▲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노조들의 포스터. ⓒ인권오름
전 세계적으로 부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비정규직을 확산시키고 있다. 하지만, 한국 만큼 비정규직이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리진 않았으리라.
한국 비정규직이 갖는 특성 중 하나는 고용과 실업이 단기간 반복되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는 여느 나라의 비정규직과 비슷하지만, 유럽의 비정규직과는 또 다르다. 유럽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에서도 복지 혜택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만, 한국은 온전히 노동소득만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실업은 곧 생계수단 박탈로 이어진다.
생계수단 박탈은 빈곤을 불러오고 빈곤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 주거, 위생,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또 최소한의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인간관계’마저도 단절하게 만든다. ‘고용과 실업의 반복’으로 인한 정신적·신체적 건강의 침해는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실업 상태에 놓인 노동자의 사망률이 고용 상태 노동자의 사망률보다 높다는 것은 이미 유럽의 연구결과를 통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이향란, 최홍렬, 백도명, 고상백 등의 연구자들이 한국의 비정규직을 연구한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정규직의 건강은 정규직보다 더 나쁘다.
▲「비정규직과 한국노사관계 시스템 변화 연구」(은수미 외, 2008)에서 수정 재인용. 주 : 본 자료(OECD, 2006)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전체 임금근로자 대비 임시근로와 시간제 근로의 추이임. ⓒ인권오름
노동권 침해가 건강권 박탈로 이어져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 건강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정규직에 비해 건강을 해치는 노동 조건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정규직은 그나마 최소한의 노동권을 보장받지만, 비정규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휴식시간과 노동시간, 노동강도, 노동안전 등 여러 면에서 더 열악하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고용을 위해 건강권을 포기하고 있다. 한 여성 노동자는 감전으로 팔이 잘려나갈 위험에 처했지만 재계약 안 될 것을 두려워해 치료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동료들에게까지 다친 것을 쉬쉬했다고 한다. 고용과 치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은 이들이 건강권을 온전히 다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주 5일제 근무는 정규직들 사이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착되면서 노동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노동시간은 정규직에 비해 여전히 길다. 장시간 노동은 신체 및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적절한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누릴 권리’가 노동권에 보장돼 있음에도 비정규직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존재다.
사회보장권 침해가 낳은 건강권 침해
▲ 고용형태별 사회보험 및 노동조건 적용률(2008년 3월, 통계청, 단위: %). ⓒ인권오름
비정규직은 다양한 사회보장제도에서도 배제돼 있다. 정부는 전 국민을 위한 의료보험시스템과 사회보험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고 하지만, 과장일 따름이다. 그런 사회보장시스템으로부터 비정규직은 배제돼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 가입률 차이는 두 배 이상이다.
정규직은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직장가입률이 98.3%인데 비해, 비정규직은 각각 33.4%와 35.8%밖에 안 된다. 지역가입(11.7%)까지 감안해도 비정규직은 국민연금 가입률이 45.0%로 절반 이상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다. 건강보험은 지역가입(32.8%),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13.7%), 의료수급권자(2.0%)까지 포함하더라도 비정규직의 15.7%가 수혜대상에서 배제되고 있다.
차별적인 시선이 낳는 정신건강의 해로움
정규직과의 차별은 단지 임금만이 아니다. 같은 일을 해도 그에 대한 평가나 시선은 차이가 있다.
2007년 3월 기준으로 신규 채용된 초·중등 사립학교 교사 가운데 비정규직이 무려 85.6%를 차지할 정도로 비정규직교사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비정규직 교원노동자들의 고통은 단지 낮은 임금만이 아니었다.
기간제 교사들에 대해 학생들은 ‘실력이 모자라’거나 ‘무시해도 되는 선생’이라는 평가를 했다. 이런 시선 속에서 기간제 교사들은 일상생활 자체가 불안하다.
차별적인 시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축시켜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겪는 실업의 상태는 정신적 황폐함과 인간관계망의 위축을 낳는다.
해법?…”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야”
앞에서도 줄곧 이야기했듯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권을 해치는 것은 ‘비정규직의 존재’ 자체이다. 비정규직이 사라지지 않는 한 비정규직의 건강권은 보장되기 어렵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비정규직이 줄어들지 않고 확산되는 추세에서 ‘비정규직의 종말’만을 기다릴 수 없다. 아니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적인 다른 권리를 누리려면, 먼저 건강권을 ‘노동권을 위해 유보해서는 안 되는 권리’로 인식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을 없애야 한다.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임금 및 노동시간ㆍ휴식시간 등의 노동조건을 같게 하고, 사회보험 등에 모두 가입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받는 차별로 ‘위축된 자존감을 회복’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인권침해에 ‘함께’ 저항하는 연대가 절실하다.
얼마 전 노동건강연대에서 조사한 ‘비정규직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의 정신건강’ 보고서에도 발표됐듯 많은 투쟁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무력감과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다. 우울증과 무력감을 이겨내려면 ‘정신건강 치유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안 된다.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립된 섬이 되지 않도록 하는 연대는 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할 것이다.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비정규직을 폐지하려고 함께 싸우고 연대하는 이들을 통해서, 또 그들이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오고 가는 끈끈한 연대가 노동자 개개인의 자존감을 회복시킬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건강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명숙/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