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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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회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고충들에 대한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오고갔습니다. 대화 중 귀에 확 들어오는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전혀 지켜지지도 않고 눈치봐야 하는데, 장시간 노동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런 거 먼저 고쳐줘야 되는거 아니에요?”였습니다.
불현듯, 얼마 전에 서울 구로지역에서 진행한 ‘무료노동 이제그만’ 캠페인이 생각나 소개를 해드렸습니다. 그러고는 다음 날 캠페인을 하고 있는 ‘노동자의 미래’ 사업단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많은 사례를 상담하고, 제보받아 노동부 면담까지 마쳤다는 담당자분은 한층 고조되어서, 사업주들로부터 확인 전화를 참 많이도 받았고 자발적으로 시정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물론 “니네가 뭔데 이런 걸 하냐”는 항의전화도 받았지만요.
그럼 노동자의 미래에 상담을 받으로 왔던 두 사람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이희선(가명)씨의 출근시간은 오전 9시, 퇴근시간은 오후 6시입니다.
그런데 정식으로 전화받는 업무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해야 하는 이씨는 조금 더 일찍 출근해서 전화받을 준비를 하고, 정해진 퇴근시간인 6시까지 전화를 다 받고 나서는 그날 들어온 콜을 정리해야 합니다. 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그 일을 하면서, 이씨는 한 번도 연장근로 수당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정리를 안 하고 가면 다음날 면담을 하거나 벌을 받습니다.
구로디지털단지의 번듯한 건물에서 일을 하는 박경호(가명)씨는 공장 생산직입니다. 교대제라 인수인계를 하는데 그 대기시간이 꼬이기 일쑤입니다. 그리하여 제대로 퇴근하기는 늘 어렵습니다. 또 업무 후 검수작업을 해야 하는 등 일상적인 연장근로가 이루어집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대청소 날에는 2교대 근무자 전원이 아침에 출근하는데, 오후 근무자는 결국 4시간이나 일찍 나와야 하는 희한한 회사입니다.
제발… 버스 타고 퇴근하는 게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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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저는 제 친구들의 무료노동 시간이 궁금해졌습니다. IT업계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보통은 연봉제 계약을 하기 때문에 야근, 철야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면서도 수당은 전혀 생각 못 한다고 늘 구시렁대던, 그래서 늘 피곤한 친구들입니다.
여의도의 한 증권사에서 일하는 안경하(가명)씨는 오전 7시 30분 출근, 오후 5시 퇴근입니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한 시간 반이라고 하더군요.
“말이 5시 퇴근이지 만날 5시 반에 퇴근해! 정규직들은 뭐 챙겨준다고 하던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일하는 거지 뭐.”(이 친구는 증권사로 파견 나가 있는 파견노동자입니다.) “야근은?”
“야, 진짜. 정규직들은 노조도 있고 하니까 야근을 하는 걸 그렇게 나쁘게 생각을 안 해. 수당 잘 챙겨 받거든. 근데 문제는 우리 같은 을, 병, 정들은 정규직들이 퇴근을 안 하면 눈치 보면서 그냥 있단 말야. 그러면 야근이지 뭐. 무료노동이시다. 나야 그래도 큰 회사에 파견 나와서 일하니까 생각보다 엄청 잘돼 있어. 물론 그렇게 퇴근시간 30분 늦추고 가끔씩 야근해주는 게 짜증나긴 하지만 어쩌겠냐. 나는 그래도 큰 회사라 좋은 편이야.”
여기서 잠시 ‘갑, 을, 병, 정’이 뭔지 살펴보겠습니다. 한 사무실에 정규직 사원 ‘갑’을 비롯한 1차 파견계약직 사원 ‘을’, 2차 파견계약직 사원 ‘병’, 3차 파견계약직 사원 ‘정’ 등이 함께 일합니다. 이런 식으로 ‘무, 기, 경, 신’까지 계속 재도급이 이어지면서 인건비는 싸지고 근무환경은 계속 열악해지죠. 이 사람들은 비슷한 업무를 함에도 한 사무실에서 이렇게 서열이 나뉘어져 일을 합니다.
갑을병정 관계는 “내가 지금 ‘정’인데 어떻게 식사메뉴를 정하냐?”, “야, 감히 ‘무’가 어떻게 휴가를 쓰냐? 반차라도 쓰고 싶다” 하는 식으로 대화에 튀어나옵니다. 언제나 갑을병정 구조의 설움을 설파하던 한 선배가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질문을 하거나 문제제기를 하면 개발량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온다. X, 그냥 있는 대로나 할걸(갑에서 시작 을을 거쳐 죽 내려오다 보면 그렇다). 괜히 물어봤나. 이 정도 양이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만한데 일정상에는 이틀만 주어져 있다. 바로 모레 저녁에 모듈테스트를 할 거란다. 오늘도 6시 퇴근은커녕 11시를 넘길 것 같다. 그냥 어떻게 해서든 잘 마무리하고 싶고, 제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퇴근 하는 게 소원이 되어버렸다.
9시쯤 되니 관리자는 어깨를 두드리며 매우 안쓰럽고 미안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진다. “늦게 되면 경비처리 해줄 테니까 새벽에 택시 타고 들어가요. 모레 테스트하니까 고생 좀 하구요, 아침에 늦으면 책잡히니까 좀 힘들어도 지각하지 말구요. 먼저 갑니다.” 그리하여 어떤 후배는 한 달에 60만 원의 택시비를 청구했다.
장시간 노동이 문제라고? 법부터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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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보고난 저는, 전문직종에서도 무료노동이 얼마나 각양각색으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일상생활에 얼마나 구조적으로 뿌리 박혀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관찰하고 고쳐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봅니다.
참으로 갈 길이 멀다 싶었습니다. 법에 정해져 있는 근로시간은 왜 안 지켜질까, 노동부는 관리감독을 왜 제대로 안 할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부터, 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며 일을 해주어야 하는가, 대체 이 나라에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범죄인가 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