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기원 632년의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사회에서 담당할 역할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다. 델타 계급이나 입실론 계급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평생 단순 노동을 반복하다 죽게 된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지적 능력 따위는 필요 없다. 생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세뇌 교육이 강조된다. 각 계급이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다른 계급의 역할이나 지위를 넘보지 않도록. 이 사회에서는 ‘소마’라는 환각제가 배급된다.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스트레스를 소마 하나로 간단히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는 신이다. 시민들이 모여서 소마에 취해 포드를 찬양한다. 포드력이라는 새로운 달력이 사용된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그린 미래 사회의 모습이다. 학창시절에는 이 책을 공상과학소설 정도로 느꼈던 것 같다. 내 눈에 세상과 미래는 모든 가능성이 열린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였으니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지금 이 책이 무서운 예언을 담고 있는 공포소설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쓴 시기는 1930년대지만 2011년 대한민국과 너무도 닮아 있다.


우리 아이들은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미래를 의지와 능력만으로 그려갈 수 있을까.  ‘간판’과 ‘스펙’으로 직업과 연봉, 배우자까지도 결정되는 대한민국에서 이 질문이 의미가 있는가. 2011년 대한민국에도 어떤 이들은 발가락 하나조차 들여놓을 수 없는 그들만의 길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면 600만 비정규 노동자와 그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정부 보조금에 기대어 그야말로 ‘생존’하고 있는 160만 기초생활수급자들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며 부유하고 있는 110만 청년 실업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럼에도 이 사회는 돌아간다. 알파 플러스 계급1)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덕분이다. 올 한해 알파 플러스는 어느 때보다 분주히 움직였다. 시장과 신자유주의가 설파하는 교리에 충실하기 위해. 멋진 신세계에서 포드가 만물 위에 서 있는 초월적 존재인 것처럼 대한민국은 시장과 신자유주의가 진리가 되어, 노동조합은 시장 질서를 왜곡하는 요인이고 시장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2011년 시장을 굳건히 하기 위한 회심의 카드를 빼들었다. 2010년 타임오프제 시행에 뒤이은 복수노조의 허용이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복수노조라는 예쁜 포장지 속에 감추어져 있던 교섭창구 단일화라는  칼날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10년 이후 타임오프제에 휘청거리던 노동조합 운동은 2011년 교섭창구 단일화에 치명상을 입고 있다. 어떤 노동조합은 어용노조에 밀려 교섭권을 상실하고 어떤 노동조합은 생존을 위해 다른 노동조합을 짓밟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교섭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합원 뺏기 싸움이 벌어지거나 노조 사이 법적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를 이이제이(以夷制夷)2)라 했던가. 알파 플러스가 날린 칼날이 정확히 델타와 입실론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는 2011년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도 힘을 기울였다. 한진 중공업 투쟁, 유성기업 파업,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 에서 보여준 정부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노동을 거부한 노동자들에게 물대포를 쏟아 부었고,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철탑을 올랐다. 덕분에 파업, 농성일수에 있어서 경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모습이다. 2010년 12월 시작된 전북고속 파업은 1년을 넘겨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2011년 1월 시작된 대우자동차 판매지회의 점거 농성이 뒤를 따르고 있다. 309일간 크레인 위에서 버텼던 김진숙 지도위원은 희망버스 덕분에 내려올 수 있었다. 재능교육노동자들의 투쟁은 1,500일을 앞두고 있다. 2012년 새해에도 전국 52곳의 사업장에서는 농성과 파업이 현재 진행형이다.


억울한 죽음도 잇따랐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이후 19번째 희생자가 나왔고, 이마트 사망 사고부터 12월의 인천공항철도 사망 사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밀려 죽음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언론도 국회도 검찰도 침묵했다. 언론은 노동자의 불법행위를 단죄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국회는 한미 FTA를 통과시켰다. 검찰도 진보정당에 가입한 공무원, 교사 색출하느라 바빴으니 시간이 부족했을 터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다시 보면서 공포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술을 권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성인들이 1년간 소주 70병, 맥주 100병을 마셨다고 한다. 소주 한잔만 마셔도 술기운이 오르는 사람들도 많을 터이니 이를 고려하면 상당한 숫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델타나 입실론이 소마에 취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듯 우리는 술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1970년대에 태어나서 19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단어일 듯하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행복이 넘쳐날 것만 같던 21세기였는데 이 꼴이라니.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한진중공업의 문을 희망버스로 열어 젖혔고, 반올림 투쟁을 통해 거대 자본을 상대로 산재 인정 판결을 이끌어냈다. 지지율 5%의 후보를 서울시장으로 당선시켰으며, SNS를 통해 알파 플러스의 강력한 무기인 기성 언론을 무력화시키기도 하였다. 봉도사(정봉주)의 구속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나는 꼼수다’ 열풍, 놀랍지 아니한가. 청년들이 청년유니온이라는 이름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희망이다.


이 같은 성과와 의미에 대해서 설왕설래 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굳건할 것만 같았던 알파 플러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었다.


희망버스를 움직였던 시인, 영화배우, 자영업자, 학생, 주부, 노동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능케 할 주역이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그람시의 ‘서발턴(Subaltern)’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 노동자 계급이 일관되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하고 진실성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1)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다양한 계급들이 존재하는데, 알파, 감마, 델타, 입실론 등으로 나뉜다. 알파 계급은 그야말로 최상의 엘리트 계급으로서, 이는 다시 플러스, 마이너스 등으로 나뉜다.


2) 적을 이용(利用)하여 다른 적을 제어(制御ㆍ制馭)한다는 의미의 4자 성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