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광저우 우칸 지역에서 토지수용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 2만 여명이 공안들과 대치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투쟁을 벌인 일이 보도되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1월에는 중국 광동성 선전과 둥관 지역에서 1만 명이 넘는 가전부품업 관련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바 있다. 이렇게 중국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투쟁과 파업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농민공’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호 해외이슈에서는 아직은 생소할 수 있는 중국 농민공의 발생과 최근의 노동운동을 주도해 나가고 있는 신세대 농민공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농민공과 호구제도1)

중국의 농민공은 농민외출무공(農民外出務工)의 줄임말로, 일반적으로 농촌 호구(戶口)를 가지고 도시 또는 비농촌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일컫는다.

중국은 1958년에 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호구등기조례’를 통하여 중국인을 농촌 호구자와 비농촌 호구자(도시호구자)로 양분하여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농촌 호구를 가진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농민공이라는 농촌 출신 노동자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농민공들이 일자리를 찾아 자신들의 호구가 있는 농촌 지역을 떠나 도시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이들은 일종의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다. 그러다보니 고정된 일자리 없이 비정규직, 일용노동자, 비공식부분 취업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합법적인 노동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임금체불이나 부당 해고 등을 겪고, 도시노동자 임금의 30%를 받고 일하면서도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또한 농민공들은 도시 호구자보다 취업 기회와 월급 액수에서 차별받고, 주택 보장, 자녀 교육 및 입학, 의료·실업·양로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생활하게 된다.2)

중국 정부도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농민공들이 주거, 의료, 교육 등의 복지서비스에서 소외되고 있고, 사람들이 농민공의 증가로 인한 도시 주거문제, 범죄율 증가 등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농민공이 중국의 경제 성장률 8%대를 유지시키는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인 공급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농민공을 중국 산업화 발전의 역군으로 추켜세우며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농민공들은 도시 지역 노동력이 기피하는 직업에서 일할 뿐 아니라 제조업, 건축업, 요식업 등 노동집약형 산업에서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비용 상승을 억제하여 세계시장에서 중국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왔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농민공은 제2차 산업 종사자의 58%를, 제3차 산업 종사자의 52%를, 가공제조업종사자의 68%, 건축업 종사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타임(Time)지는 2009년 올해의 인물에 중국의 노동자들을 순위에 올리고, 이들이 중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보도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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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의 2009년의 인물에 중국의 노동자들이 순위에 오르면서 실린 심천의 여성농민공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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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2009 올해의 인물 순위에 오른것을 보도하며 인터넷에 올라온 농민공 사진

§ 신세대 농민공의 출현과 특징

농민공들 중에서도 1990년대 말부터 도시로 진입한, 이른바 1980년 이후 태어난 농민공들을 ‘2세대 농민공’ 또는 ‘신세대 농민공’이라 부른다. 신세대 농민공들은 부모를 따라 유년기에 도시지역으로 이주했으나 부모의 호구에 따라 농촌 호구를 가지게 된 이들과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한 이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집단의 성격을 하나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신세대 농민공들은 이른바 ‘1세대농민공’들과 비교하여 학력이 높고, 여성의 비율이 높으며, 제조업과 서비스?판매직에서 일하는 비율이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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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농민공이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았던 반면, 신세대 농민공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교육수준에 있어서도 1세대 농민공의 90% 가까이가 중학교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신세대 농민공들은 70~80%이상이 중학교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2010년에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비율이 30~40%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가 보여주고 있다. 신세대 농민공들이 주로 취업하고 있는 업종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주된 업종이다. 비슷한 연령대의 도시호구를 가진 ‘도시 신세대’가 에 제시된 세 가지 업종에 종사하는 비율이 42.6%를 차지하고 표에 제시되지 않은 나머지 직종들에 취업하는 비율이 절반이 넘는 반면, 신세대 농민공들은 72~86% 가까이가 제조업과 서비스업이라는 두 업종에 집중되어 실질적으로 직업선택의 기회가 많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 신세대 농민공과 난하이 혼다 파업

신세대 농민공은 2010년 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팍스콘 노동자의 잇따른 자살3)과 지난해 5월에 있었던 난하이 혼다 등의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한 파업과 관련하여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팍스콘의 신세대 농민공들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연장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저임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죽음으로 저항하였고, 이들의 죽음 이후 자동차산업의 신세대 농민공들은 주요 자동차회사들의 생산 라인을 멈추고 임금인상, 노조재결성 등을 요구하며 투쟁으로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맞섰다.

2010년 5월 17일에 시작되었던 난하이 혼다 파업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의 생산 라인을 마비시키는 위력을 보여주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 중국 광둥성에 위치한 ‘난하이 혼다 부품제도 유한회사’에서 파업이 발생하여 중국 내 혼다자동차의 생산이 마비되었고, 5월 28일 베이징 현대자동차 협력사인 성우하이텍으로 파업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5월 29일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자한 베이징 지푸어그룹의 노동자들이 잇따라 파업에 돌입했고, 6월 18일 톈진 도요타 제2자동차 공장도 파업으로 생산이 중단되는 등 자동차 산업 전반에서 연쇄 파업이 일어났다. 이들 파업은 제조업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일부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동시에 신세대 농민공들의 강한 집단의식과 단체행동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난하이 혼다 파업은 중국 정부와 공회4)(노동조합)의 통제 밖에서 구축된 노동자 조직들이 그동안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구축해온 네트워크를 통해 노동자들을 지원해 온 과정들이 일정 부분 힘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지역 기반 노동 운동의 중요성을 보여주었고, 이후 언론 매체의 보도 등을 통해 이들의 파업을 알게 된 노동자들이 연이은 파업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파업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일종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한국의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사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중국의 신세대 농민공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투쟁 경험과 조직능력을 갖춘 노동자 대오를 형성해가며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발전시키고, 공회와 정부의 노동 제도를 개혁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단결하면 자신들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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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난하이혼다에서 파업 투쟁을 하는 신세대농민공들


1) 중국의 호구제도에 대한 내용은 [공봉진. 중국의 개인인권변화에 관한 연구. 동북아시아문화학회, 동북아 문화연구, 제26집 2011.3, pp445-459]를 참조하였다.


2) 중국의 산업화에 따른 값싼 노동력의 지속적 공급 필요성에 따라 중국 당국은 인구의 급격한 도시 유입을 막으면서도 지속적 공급이 가능하도록 호구제도를 부분적으로 완화하여 농민공들의 도시 진입을 허용해 왔다. 한편 호구제도로 인한 문제가 계속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구제도를 철폐하자는 제안들이 나오면서 호구제도를 철폐하는 지역도 증가하고 있다.


3) 노동과 건강 79호의 해외이슈에서도 다룬 바 있는 팍스콘의 자살은 17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 노동자, 즉 신세대 농민공들의 죽음이었다.  


4) 중국 법률은 일원화된 공회 체계를 규정하고 있어 중앙과 지방의 공회에 소속되어야만 합법적으로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고 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다. 2010년의 자동차산업 파업 기간 중 공회들은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각 지역 공회는 파업노동자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2010년의 자동차산업 파업은 정부 내에서도 공회의 역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