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돌아보면서, 많은 이들이 올해처럼 다사다난했던 해는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 가지로 요약해보자면 현존하는 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위기와 그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대응, 불가항력이었던 자연재해와 그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위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와중에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투쟁했고, 일부는 승리하고 일부는 패배했다.

현존하는 정치적?경제적 질서의 위기: 세계를 휩쓴 민중운동

타임(Time) 지가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 (protesters)’를 꼽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재스민 혁명” 혹은 “아랍의 봄”으로 명명된 아랍 세계의 민중운동은 전 세계에 ‘혁명의 실시간’을 보여주었다. 튀니지에서 한 젊은 노점상의 분신으로 시작된 투쟁의 불길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은 사우디 아라비아로 망명했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은 군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법정에 섰으며, 치열한 내전으로까지 격화된 리비아에서는 40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살해되었다. 알제리, 모로코, 예멘 등에서도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리아에서는 유례없는 규모의 대중 시위와 정부의 폭력적인 유혈 진압으로 국제사회가 들끓었다. 이들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려운 경제상황과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 율법주의와 세속주의, 다양한 부족/세력들 간의 갈등을 헤쳐 나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지역의 석유자원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와 개입은 문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민중 투쟁은 지중해 너머 유럽,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졌다.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유럽 정부들의 재정 긴축과 사회보장의 축소,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경제상황은 많은 유럽인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때로는 영국 런던에서처럼 격렬한 ‘폭동’의 형태로 일어나기도 했고, 스페인 마드리드 ‘태양의 문’ 광장 점거처럼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도 연일 파업투쟁과 대중 시위가 이어졌고, 칠레 대학생들의 등록금 시위는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제 자본주의 핵심부 미국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전대미문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투쟁들이 시작된 순간은 우발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저항 그 자체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군사력과 달러에 기초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가 지구촌 곳곳에서 평범한 많은 이들의 삶을 나락으로 밀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투쟁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아무리 좋은 촉매가 있다고 해도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원 물질들이 없다면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드디어 구체제, 자본주의의 위기가 임박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과도하지만, ‘현존’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방식의 위기 대응: 극우의 준동과 전쟁

하지만, 민중들의 위태로운 삶이 긍정적인 투쟁으로 이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평화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테러에 그야말로 전 세계가 놀랐다. 그 아름답고 호젓한 섬에서, 그것도 청소년들에게 자행된 총기난사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성급한 이들은 알카에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이민자들에게서 혐의를 찾으려 했지만, 놀랍게도 범인은 ‘멀쩡한’ 노르웨이 시민이었다. 이는 최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준동하고 있는 우익 폭력의 극적인 단면일 뿐이었다. 러시아와 독일의 스킨헤드 문제는 수 년 전부터 지적된 바 있고, 최근에는 한국인이 이들 인종주의 폭력의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강력한 사회적 민주주의적 전통을 가진 노르딕 국가들에서 극우정당이 유의미한 의석을 차지하고,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극우 국민전선 르펜의 딸이 2012년 유력한 대선후보로 나섰다. 점증하는 위기와 생계 불안 속에서 대안적인 사회적?정치적 세력과 전망이 부재할 때, 파시즘과 무력충돌의 가능성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가 뼈아프게 깨달은 교훈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은 그리도 오매불망하던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을 ‘완수’했고, 드디어 이라크 전 종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정말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세계의 깡패 이스라엘은 여전히 막무가내로 팔레스타인 지구를 봉쇄하고 이제는 이란 핵 때문에 불안해 못살겠다며 공격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위기점화의 가능성이 높은 곳은 어쩌면 한국 사회일지 모른다. 노르웨이 테러범은 순혈주의와 인종주의, 가부장제가 공고한 한국이 자신이 꿈꾸는 사회라고 했다. 지하철광고판에, 텔레비전 광고에, 모든 곳에서 ‘다문화’를 이야기하지만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 편향은 매우 심각하다. 이주민들, 특히 비(非) 백인들은 일상적인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백주 대낮에 혐오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비단 인종/민족적 차이 뿐 아니라, 동성애자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가히 정신병리 수준이다. 최근 서울시 학생인권 조례 제정과정에서 보여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는 나치스와 노르웨이 테러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한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무감각하지만, 많은 이들이 세계에서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는 곳이 바로 이곳 한반도이다. 현 정부 집권 이후 남북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긴장이 높아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를 더욱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우발적인 자연재해와 필연적인 결과들

정치경제적 상황만 어지러운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엄청난 자연의 힘은 올해도 그 파괴적인 결말을 보여주었다. 3월 봄날에 일본 동북지방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는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5월에 발생한 미국 미시시피 강의 범람, 7월말부터 4개월이나 지속된 호우와 그로 인한 태국의 대홍수도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타일랜드의 물난리가 60년 만의 대홍수였다면,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케냐 등이 위치한 북동 아프리카는 60년 만이라는 최악의 가뭄에 시달렸다. 에이즈 환자들이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식량을 구하지 못해 약 복용을 중단하는 일마저 발생하고 있다. 그 밖의 ‘소소한’ 지진과 자연재해들은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1년 벽두의 혹한과 폭설, 수도권을 강타한 가을의 폭우는 많은 이들에게 새삼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모든 재해들은 우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았다. 같은 비를 맞고 같은 가뭄을 경험했다지만 그 피해마저 똑같이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연재해는 자연재해로 끝나지 않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일본 지진 이후에 벌어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누출은 인류가 만일 지속된다면 두고두고 기억될 최악의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은 위험한 방사능 유출 현장에서 목숨을 건 ‘영웅적’ 작업을 해야 했다.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세력 뿐 아니라 전체 일본인들, 전 세계인들, 무고한 해양생물들마저도 방사능 피해를 입고 있다 ( 2011년 여름호 참조).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듯, 지구온난화와 함께 이러한 자연재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전망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지나간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얻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핵발전소 개발 중단을 결정했고, 독일 메르켈 총리도 핵 발전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폐기했다. 일본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반핵의 열기가 높다. 이 상황에서 세계 ‘원전 수출국’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이 독창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노동자는 싸운다

이 모든 혼돈과 고통 속에서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집트의 민주화 투쟁에서 가장 강력하게, 가장 끈질기게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 2011년 봄/여름호). 유럽에서, 미국에서, 남미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많은 이들이 바로 노동자였다.

주류 언론들이 광범위한 ‘시민’ 운동으로서 아랍의 봄과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을 이야기하지만, 노동자들이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 위스콘신에서 벌어졌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 총파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스콘신 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 박탈을 핵심으로 하는 주지사의 법안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다양한 주체들의 대투쟁은 근래 미국 사회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 2011년 봄/여름호). 이 투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8월에 의회 소환투표를 통해 공화당 의원 2명을 민주당으로 바꾸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주지사 소환투표가 조직 중이다. 두 달 동안 지난 주지사 선거 때 투표수의 25% 이상의 주민 서명을 받는 것이 투표 시행 요건인데, 운동진영은 진행 과정의 손실을 감안하여 33%, 72만 명을 목표로 삼았다. 이제 서명 운동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고, 12월 중순 현재 약 50만 명의 주민 서명을 모았다. 만일 이 투표가 성사만 된다면 주지사 퇴출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내 뉴스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1월 미국의 총선거에서 위스콘신 주와 마찬가지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협약권을 제한하려는 공화당 주지사의 법안이 총투표로 부결된 바 있다. 만일 이번에 위스콘신에서 노동악법을 도입한 주지사를 주민소환 투표로 퇴출시킨다면 이는 노동권과 관련하여 세계적으로도 의미있는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정말로 귀추가 주목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응원해야 할 투쟁이다. 

만일 내년 이 즈음에, 2012년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보게 될까? 현재의 정치경제적 질서가 가진 모순과 위기는 더욱 심화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변혁이나 긍정의 에너지로 전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칼 마르크스는 (1852)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그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계승된,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서 그것을 만든다. 죽은 모든 세대들의 전통이 살아 있는 자의 머리 속에서 악몽처럼 짓누른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