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이슈
영국 건설노동자, 블랙리스트에 맞서 싸우다
박진욱 /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블랙리스트’라는 말은 어느새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MBC, KBS 등의 방송사에 일부 연예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 보도된 바 있고, 두산중공업, 양주상운, 울산지역 건설플랜트노조, 현대중공업, KT 등에서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취업을 제한하거나, 노동조합 선거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해 왔다는 사실들도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런던올림픽이 열린 영국에서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대규모 소송이 벌어질 예정이어서 그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
지난 2009년 3월, 영국 정보감독관실(Information Commissioner’s Office, ICO)1)은 우스터셔주(Worcestershire) 드로이트위치(Droitwich)에 자리한 한 사무실에서 3,213명 노동자의 이름, 주소, 사회보장번호, 직업력, 가족 관계, 노동조합원 여부, 노동조합 활동 참여 여부 등과 얼마나 강성 조합원인지 또는 회사에 얼마나 골칫거리가 될 수 있는지 등의 사찰 정보가 적혀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 주로 건설현장의 안전보건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단체 행동을 조직하거나, 안전보건 대표를 맡은 이들이 명단에 올라 있었다.
66살의 이안 케르(Ian Kerr)가 운영하던 문패도 없는 사무실에서 발견된 이 문서들은 대형 건설 회사들의 자금 지원을 받는 ‘컨설팅 연합(Consulting Association)’이라는, 이름부터 불분명한 단체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수집된 조합원 정보는 44개의 건설 회사들로 팔려나갔다.
건설 회사들은 일 년에 3000파운드(약 530만원)를 연회비로 지불하고, 블랙리스트를 조회할 때는 한건 당 2파운드(약 3,500원)의 요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컨설팅 연합은 폐쇄되었으나, 사설 조사원이던 이안 케르에게는 데이터보호법 위반으로 겨우 5000파운드(약 880만원)의 벌금만이 부과되었으며, 40여개의 건설 회사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46살의 엔지니어 데이브 스미스(Dave Smith)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그가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 것은 안전보건 노동자 대표로서 작업장에서 석면 노출 등을 포함한 안전보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르고서 소득은 4만 파운드에서 1만2천 파운드가 됐고 그의 자녀들은 우유 급식을 받아야 했다. 스미스에 관한 파일은 36쪽짜리로, 1992년부터 2005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파일에는 스미스의 노동조합 활동, 작업장 안전을 위한 노력, 사회보장 번호, 정치적 활동, 사진, 그의 자동차와 그의 형제가 일하는 곳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미스는 카릴리온(Carillion)이라는 건설 회사를 상대로 고용 심판을 제기했다. 그동안 블랙리스트로 인해 입었던 손실에 대해 17만5천 파운드(약 3억)를 보상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카릴리온은 자회사 두 곳에서 스미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그가 조합원이며 작업장의 안전보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에 대한 정보를 컨설팅 연합에 은밀히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카릴리온의 승리였다. 카릴리온이 스미스의 직접 고용당사자가 아니고, 스미스가 에이전시를 통해서 일을 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이유였다. 카릴리온은 스미스를 포함하여 224명의 건설노동자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2). 뿐만 아니라 한 분기에만 2,776명의 노동자의 이름을 컨설팅 연합에 확인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74살의 믹 애봇 (Mick Abbott)의 파일은 19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2006년 피케팅을 한 기록이다. 건설회사들은 무려 40년이 넘게 그를 추적하고, 고용에 불이익을 주었던 것이다. 애봇은 1985년부터 일자리를 잡는 것이 어려웠으며, 이로 인해 결혼 생활이 파탄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료 식사를 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가 대회장으로 입장할 때 성화 봉송 주자를 맞은 500여명의 건설노동자들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실제 올림픽 경기장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런던올림픽에 사용할 미디어 센터, 경기장 등을 건축하는 현장에서 여전히 블랙리스트가 사용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의혹을 제기했던 프랭크 모리스(Frank Morris)라는 노동자는 관리자에게 폭력을 동반한 위협을 당한 뒤 해고되었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서 고용 심판에서 승리한 몇 안 되는 노동자 중 하나였던 스티브 켈리(Steve Kelly) 역시 올림픽 현장에서 일을 구하려 했지만 런던 최고의 골칫덩이라며 채용을 거절당했다.
스미스와 애봇을 비롯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정이 파괴되고, 아이들에게 적절한 영양을 공급할 수 없게 되거나, 스트레스로 신경쇠약을 앓는 등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컨설팅 연합은 지난 30여 년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이브 스미스의 재판 중에 정보감독관의 증언을 통해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이들이 수집한 정보들 중 일부는 경찰이나 정보기관(MI5)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으로, 경찰과 정보기관이 이들과 공모하여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한편 컨설팅 연합에 대해서는 그 뿌리가 경제 동맹(Economic League)이라는 단체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제 동맹은 1919년부터 1993년까지, 자유로운 기업 활동에 반하거나, 반체제적인 성향을 보이는 인물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동하던 단체이다.
경제 동맹은 특히 1940년대 이후 MI5와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부터 핵 폐기론자까지, 주로 좌익성향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왔다. 이때 주요 건설 회사들은 IRA의 테러 위협이 있는 가운데 아일랜드계 건설 노동자들을 밝혀내는 데 정부와 협력 작업을 해왔고, 이러한 토양 속에서 컨설팅 연합에 이르기까지 정보기관과의 협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 동맹은 1980년대 들어와서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며 1993년에 해체되었지만, 이때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자료들이 카프림(CAPRiM)3)과 컨설팅 연합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0년 3월, 고용관계법에 노동조합 조합원에 대한 블랙리스트 규제부분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블랙리스트를 규제하는 법이 만들어졌으나, 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가장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의 모임인 건설노조의 반대가 이어졌다. 건설노조는 논의 과정에서 법이 불충분하며, 이런 수준으로는 블랙리스트를 근절할 수 없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했으나, 결국 노동조합이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법은 발효되었다.
2010년 3월에 발효된 법은 개인, 회사 또는 어떤 조직이든 특정한 배제를 목적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거나, 사용하거나, 팔거나, 유통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용자로부터 채용을 거부당하거나, 고용 에이전시에서 서비스 제공을 거절 당하거나, 해고 당하거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어떤 다른 종류의 해를 입어 고통 받거나 했을 경우, 고용 심판소에 소를 청구할 수 있다. 소는 개인이 청구할 수도 있고, 노동조합에서 청구할 수도 있으며, 보상은 최대 65,300파운드 (약 1억 1천 5백 만원) 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에는 형사 처벌 조항이 빠져 있고, 노동조합 활동을 매우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비공식적 행동에 관련된 노동자 보호 부분이 빠져 있다. 이는 안전상의 이유로 작업을 중지하거나 잔업을 거부하면 합법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려도 된다는 뜻이 된다.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현재 17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송을 고등법원에 제기했으며, 소송 참여자가 늘어나면 금액은 무려 1조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영국에서 가장 큰 건설회사 중 하나인 로버트 맥알핀사 (Sir Robert McAlpine Ltd.)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로버트 맥알핀사는 런던올림픽 경기장 건설에 5천만 파운드를 기증했고, 경기장 건설 컨소시엄을 주도하여 입찰을 따내 런던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한 회사이다. 그리고 2009년 컨설팅 연합의 블랙리스트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컨설팅 연합에 연회비를 내고 있던 현직 회원사 중 하나였다. 피해노동자들은 로버트 맥알핀사가 나머지 40여개 회사들을 선도하여 블랙리스트를 이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송의 결과는 빨라도 2013년이 되어야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블랙리스트 문제는 실체가 드러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많다. 우선 건설회사들이 경찰이나 MI5와 결탁하여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에 대한 진상 조사도 필요하고, 직접고용이 아니라 에이전시를 통해 간접 고용되는 노동자에 대한 보호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들은 건설사들의 공식적인 사과를 원하고 있다. 노동조합에서 블랙리스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사용자들은 편집증이 아니냐, 절대 블랙리스트 같은 것은 없다는 등의 답변으로 일관해왔었지만, 그 실체가 명백히 드러난 이상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하여 유럽 의회의 고용사회위원회(Committee on Employment and Social Affairs)에서도 블랙리스트를 이용하는 사용자에게 강한 제재를 가하려는 노력과 함께 안전보건 노동자 대표에 대해 사용자가 불이익을 줄 수 없도록 규제하고 안전보건에 대한 내부 고발자를 보다 잘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려는 계획이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블랙리스트가 드러나고,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명백한 지배?개입 의도가 있는 부당노동행위임이 뻔히 눈에 보이는 데도 아무런 처벌조차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용자들의 반인권적, 반노동적 행동에 대한 적극적인 제재와 처벌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관련법의 재?개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림 1)] 블랙리스트 지원 그룹이 2010년 7월에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 21차 “전국 위험관리 컨퍼런스 (National Hazards Conference)”에서 ‘알란(Alan)’상(지역사회 환경 보건과 작업장 안전보건을 위해 열심히 활동한 이들에 대해 고인이 된 활동가 알란 달튼(Alan Dalton)을 기리며 주는 상)을 수상했다. (사진 출처: www.hazards.org)
[그림 2)] 런던올림픽 관련 건설 현장에서 블랙리스트가 사용되고 있다는 내부 고발을 한 뒤 해고된 프랭크 모리스 (사진 출처: Blacklist Support Group)
[그림 3)] 프랭크 모리스(메가폰 든 사람)와 조합원들이 올림픽 건설 현장에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블랙리스트를 금지하라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www.hazards.org)
[그림 4)] 2011년, 맨체스터에서 블랙리스트를 멈추라는 행진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사진 출처 : http://manchestermule.com)
1) ICO(The Information Commissioner’s Office) : 정보감독관실. 정보 공개 및 개인정보 보호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한 영국의 공공기관이며 데이터보호법, 정보보호법 등의 법률을 총괄하고 있다.
2) 블랙리스트와 관련하여 카릴리온과 자회사들이 저지른 일들은 영국의 일반노조인 GMB가 2012년 6월에 발표한 보고서 [BLACKLISTING ? illegal corporate bullying: endemic, systemic and deep?rooted in Carillion and other companies]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보고서 원본 링크 : http://www.gmb.org.uk/pdf/The%20Carillion%20Blacklist%20v12%20(1).pdf
3) 카프림(CAPRiM) 역시 컨설팅 연합과 비슷한 단체로 경제동맹 해체 직후 만들어졌다. 카프림은 맑시즘, 생태주의, 윤리적 소비, 국가간 모니터링, 노동조합 등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기업의 독립성을 위협할 수 있으며, 이러한 위험에서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회사가 원하는 사람에 대해 개인의 ‘진실성’을 확인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