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직업성 재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2006년 연례회의 참여기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아시아 노동자의 건강을 지켜라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
지난 11월4일부터 6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는 ‘직업성 재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Asian Network for the Rights of the Occupational Accident Victims, ANROAV)’의 2006년 연례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1997년 결성되었고, 현재 아시아지역 15개국의 노동조합, 노동안전보건 단체,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이 가입되어 있다. 조직 이름이 네트워크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직의 주된 역할과 활동은 아시아 지역 노동안전보건 관련 단체간의 정보 교류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노동건강연대와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이 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이번 연례 회의에 노동건강연대는 가입 단체로서,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는 참관 자격으로 함께 하였다.
* 아시아 매년 20만명이상 산재사고로 사망
2006년 연례 회의의 주제는 ‘아시아에서 노동자 안전 증진을 위한 풀뿌리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역할과 중요성(Role and Importance of the Grassroots OSH Movement in Promotion of Workers Safety in Asia)’이었다. 날로 그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는 아시아 지역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를 사회화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기 위하여, 아시아 지역 노동안전보건 단체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네트워크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아시아지역의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날로 그 규모와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은 이미 산업화된 나라로서 재래의 문제와 함께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등은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와중에 한국이 30여 년 전 경험했던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 그 중간에 놓여 있는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노동착취적인 외국 자본이 유입되고 급격히 신자유주의적인 형태로 산업화 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아시아 노동자의 삶과 건강은 공통적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여 지난 2005년 9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의 제17차 회의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특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언급되었다. 국제노동기구는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 매년 20만 명 이상이 산재 사고로 사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대다수는 중국과 인도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고로 인한 사망만을 추정한 것으로서, 대다수의 직업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이 누락되어 있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아시아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의 규폐증·카드뮴 중독자 대거 참석
그러나 문제의 규모와 심각성에도 그 해결 방법은 간단치 않다. 노동안전보건 문제는 다른 노동 문제와 마찬가지로 조직된 노동자의 저항과, 정부의 제도 수립과 적극적 행정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조직된 노동자의 힘은 미약하고, 정부는 그 힘이 미약하거나 노동자를 위한 정책과 행정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상황이니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직업성 재해 피해자 조직이나 노동 인권 운동을 벌이는 민간단체가 운동의 주요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의 70년대, 8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
이러한 조건에 대한 공유를 기초로 하여, 연례 회의는 먼저 작년에 제기되었던 활동에 대한 진행 상황을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보석 광산에서 일하다 규폐증을 얻은 중국과 인도 노동자들의 투쟁, 홍콩의 금산공업(Gold Peak Ltd.) 중국 공장에서 일하다 카드뮴 중독에 걸린 노동자들의 보상 투쟁, 아시아에서 석면 사용 전면 금지를 위한 투쟁, 중국의 석탄 광산 사고에 대한 고발 등이 회의 초반에 이루어졌다.
이 시간에 주목받은 문제는 단연 중국 문제였다. 중국에서는 홍콩 노동인권단체의 도움으로 규폐증, 카드뮴 중독 환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들은 중국에 와 있는 해외 기업의 문제점과 날로 커져 가는 중국 자본가들의 탐욕, 정부의 무능력과 직무 유기 등에 대해 목소리 높여 고발했다.
특히 날로 늘어가는 전력 수요를 채우고자 아무런 안전 조치 없이 파헤쳐지고 있는 석탄 광산 사고로 인해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매년 몇 천 명에 달한다는 보고를 접하고, 모든 회의 참석자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정상적으로 하루에 생산되어야 할 석탄양의 10배 이상을 채탄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면서, 중국 노동자들은 심각한 노동 착취와 더불어 생명의 위협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국 정부는 사고가 발생한 뒤 말로만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며, 탄광 회사에 대한 규제는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는 현재 산재 보상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법정에서 회사를 상대로 직업성 질환에 대한 민사배상을 청구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매년 두 자리 수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엄청난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국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중국 노동자의 피가 배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삼성·LG 등 전자기기 폐기물 아시아에 폐기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노동조합은 관변화 되어 있어 제대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고, 중국 정부는 경제 발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있으며, 노동 인권 및 노동안전보건과 관련된 민간단체는 거의 없는 현실이어서 문제 해결의 고리를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지금 현재는 홍콩의 노동 인권 단체가 중국에 들어가 활동을 벌이면서 그나마 대사회적 활동을 벌여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자발적인 노동자의 외침이 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과 투쟁이 조직되는 법이다.
작년 투쟁 보고에 이어 아시아에서 전자산업의 문제점에 대해 그린피스 동남아시아 지부 활동가가 발제를 했다. 그는 초국적기업인 휴렛팩커드, IBM, 삼성, LG 등의 전자산업 회사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전자 기기 폐기물을 양산하고 있는데, 이를 대부분 아시아지역에 폐기하거나 아시아지역 소규모 사업장에서 재활용 공정을 거친다고 고발했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지역 노동자와 어린이들이 전자제품을 이루고 있는 각종 플라스틱 분해물질과 다양한 유기용제 및 중금속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래서 그는 노동인권단체와 환경단체가 연대하여 전자회사가 폐기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어진 토론에서 몇몇 아시아 노동안전보건 단체 활동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린피스의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과연 그린피스가 그런 제안을 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린피스가 아시아 노동자들을 위해 과연 한 일이 있는지에 대한 반성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흥미로운 논쟁 주제였지만 그린피스 활동가가 이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였고, 시간이 많지 않아 더 이상 논의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 한국의 ‘살인기업선정식’ 국제사회 관심 높아
회의 둘째 날에는 참여한 각 나라별로 단체 활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노동건강연대도 이 시간에 기회를 얻어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발표하였다. 주로 올 한 해 양대노총, 민주노동당, 매일노동뉴스와 더불어 진행한 ‘산재사망대책마련을위한공동캠페인단’의 활동을 소개하였는데, 참여자들은 산재사망이 일어난 기업을 ‘살인기업’으로 명명하고, 살인기업의 순위를 매겨 선정식을 거행한 2006년 4월 행사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여러 단체 활동가들이 그 이후 기업체와 정부의 대응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고, 자기 단체에서도 이를 원용하여 사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어서 참관 단체로 참여한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는 산재노동자 자활사업을 소개하여 역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어서 이번 회의의 중심 주제로서 아시아지역 노동안전보건 운동에 있어 단체의 역할 및 ANROAV의 역할에 대한 집단 토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 간에 상황의 차이가 워낙 심해 공통의 결론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물론이거니와 노동관련 민간단체의 활동마저 미미한 중국 노동자들과 산재 피해자 단체의 대표들은 산재 피해자 단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고, 또 어떤 나라 단체는 피해자 단체의 한계를 거론하며 노동안전보건 관련 민간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러한 와중에 우리는 노동조합 등 조직된 노동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만, 이는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에는 멀고먼 미래의 얘기였다.
네트워크가 집중할 이슈와 관련해서도 논의에 어려움이 있었다. 진폐증, 규폐증, 석면증 등 광산업과 관련된 문제와 유해화학물질 생산 및 취급 산업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 단체와, 근골격계질환, 정신질환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등의 단체 사이에는 운동의 강조점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었다.
* 자본 국경 넘어 아시아 노동자 하향평준화
결국 회의를 통해 하나의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교류와 연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였고, 향후 연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기로 합의하였다. 모임의 성격이 어차피 네트워크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결론도 그리 불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의 활동가들은 따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 향후 보다 긴밀히 연대하면서 공동의 사업을 모색해 보자는 추가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큰 수확이다.
자본은 국경을 넘나들며 아시아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하향 평준화시키고 있다. 충혈된 눈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희생자를 찾는 뱀파이어와 같이, 자본은 더 싼 가격으로 공급될 노동력을 찾아 아시아를 배회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본의 욕망의 심장에 쇠말뚝을 박는 작업은 아시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한국의 노동 운동이 아시아로 눈을 돌릴 필연과 이유가 있다.
※ 지면을 빌어 태국 방문 동안 자원 봉사 형태로 통역을 도와주신 ‘아시아 여성을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Asian Women)’ 활동가이신 박진영 동지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