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이슈


노동과 건강을 위한 국제연대

– 미국 공중보건학회 참가기1)

 김 명 희 / 노동건강연대회원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지난 10월 말, 국내의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연구자들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 공중보건학회 (American Public Health Association, APHA) 104차 연례회의에 다녀왔다. 굳이 바다 건너 먼 나라 학회까지 왜 가게 된 것이냐 하면, 이 학회의 직업안전보건 분과에서 열리는 반도체 노동자 건강문제 세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학회 전후로 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권을 주제로 몇 가지 국제연대 활동도 계획되어 있었다.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말처럼 비싼 비행기 타고 멀리까지 왔으니 알뜰하게 다른 활동 계획들도 세웠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는 보건 의료 및 돌봄 분야의 노동권?건강권 운동이 비교적 활발한 곳이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그 곳에서 보고 듣고 생각했던 몇 가지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활동가와 연구자가 함께 하는 공간

미 공중보건학회는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 속한 연구자들 뿐 아니라 공중보건 실무자와 활동가들도 대거 참여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학술대회와는 모습이 좀 다르다. 특히 직업안전보건 분과에는 노동조합이나 안전보건 활동가들의 직접 참여가 두드러진다. 학회의 공식 개회 전날 ‘전국 직업안전보건연합 (National Coalition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최고회의가 열렸다. 행사는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 투쟁을 담은 동영상 상영 이후 APHA 전임 회장인 린다 메이 머레이의 개막 연설로 시작했다. 그 자신이 흑인 여성으로서, 소수자와 빈곤층의 건강권을 위해 30년 이상 활동해 온 전문가이자 활동가이기도 한 그녀는, 1995년에 시카고에서 벌어졌던 교원노조의 감동적인 투쟁 경험을 소개하며, 권력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한국의 예방의학회나 직업환경의학회 회장이 학회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미국의 노동운동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슬프게도) 우리가 그럴만한 처지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음 프로그램도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Worker Dialogue”라는 프로그램인데, 일종의 토크쇼이자 간담회였다. 활동가들이 편한 차림으로 나와서 각자 세차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캠페인 경험, 아시아 지역 전자산업 노동자 투쟁 사례, 캘리포니아의 네일 케어 노동자, 호텔 노동, 화물/폐기물 처리 노동자 조직화와 안전보건 활동 경험을 소개하며 어려웠던 점, 성공 요인들을 이야기했다.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지만 ‘노동자는 하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거창하고 완벽한 ‘성공의 스토리’는 없었다. 성차별, 인종차별, 반(反) 노동조합 정서와 무기력,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실질적 위협과 보복들을 넘어서 얻어낸 작은 승리들과 앞으로 남은 과제들, 연대의 요청은 사실 언어와 무대배경만 바꾸면 한국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토크쇼를 주재했던 젊은 활동가는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사흘 후 APHA 직업안전보건 분과가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이 분과의 공로상은 뛰어난 연구자 뿐 아니라, 직업안전보건에 기여한 활동가들에게도 주어진다. 재작년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가 받았던 국제부문 공헌상의 올해 수상자는 중국의 유잉이었다. 그녀는 또래의 중국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기차로 사나흘이 걸리는 도시로 이주하여 열악한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장시간 노동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열일곱 살, 그녀가 일하던 장난감 공장에 불이 났다. 노동자 감시를 위해 탈출구는 폐쇄되어 있었고, 많은 소녀들이 숨졌다. 유잉은 이 사건의 생존자였다. 그녀는 온 몸의 75%에 화상을 입었고, 지금도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존해서 걸어야 한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 여성, 장애인, 산재 노동자로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해왔다. 이제 겨우 삼십대 중반인 그녀는 많은 중국 여성 노동자 투쟁에서 맏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영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그녀가 통역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연대를 요청했을 때, 강당의 모든 이들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수상을 축하하면서도, 나는 약간 우울해졌다. 왜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고, 언제 어디에서건, 노동자가 죽지 않으면 좀처럼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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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버클리대학 리카싱 센터에서 발표하는 중국 활동가 유잉과 통역을 맡은 홍콩 활동가

       

§ 국제 전자산업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연대활동

사실, 이번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은 전자산업 노동자 건강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유하고, 전자산업의 총본산이었고 지금도 ‘본부’ 격인 미국 안에서 학계 내에 이를 공론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연대활동을 해왔던 단체와 활동가, 연구자들은 “국제 반도체 산업의 건강영향에 대한 역학적 검토”라는 구연 발표 세션, 라운드테이블을 조직하고, APHA 정책 위원회에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권 보호와 관련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구연 세션에서는 보스턴 대학의 역학자 리차드 클랩 교수가 미국 IBM 사례를, 한국의 김인아 교수가 ‘국제직업환경의학회지’에 발표했던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사례보고를 발표했다. 또한 대만 국립 양밍 대학의 린 이핑 교수가 비판적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대만 전자산업 여성 노동자 건강문제를 발표했고, 나는 반도체 산업의 암과 생식보건 영향에 대한 기존 역학연구결과들을 종합한 리뷰 결과를 발표했다. 상당히 많은 청중들이 발표장에 모였고,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세션이 끝난 후 직접 찾아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전자산업의 건강 문제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고 이야기해준 이들도 있었다. 발표문 결론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반도체 산업은 기술 자체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며, 전 세계적 생산 연결망 속에서 위험이 빠르게 이전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 연대와 정보 공유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학술적인 것보다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할 것인지, 특히 현재 전자산업의 주요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아시아 지역의 활동을 어떻게 펼쳐나가는 것이 좋을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또한 빈센트 나바로 교수와 더불어 미국 내 대표적인 진보적 성향의 보건의료 전문가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하워드 웨이츠킨 교수는, 포스터 발표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장하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미국 내 진보적 사회운동의 중요한 후원자 역할을 해온 통신기업 크레도 모바일 (Credo Mobile)로 하여금, 삼성전자와의 거래를 중단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사실 AT&T나 Verizon 같은 시장지배적 통신사가 아닌 크레도의 조치가 삼성에게 과연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평소에 크레도가 내세운 가치와 고객 신뢰를 고려한다면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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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자신의 포스터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워드 웨이츠킨 교수

그리고 우리 그룹이 APHA 정책위원회에 제기한 결의안은 이견 없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빠르게 성장하는 국제 전자산업의 건강 영향과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알 권리 보장, 제품 설계를 통한 건강 문제 예방, 다양한 수단을 통한 노동자 건강 감시라는 세 가지 전략을 제안했고,2) 학회 마지막 날 보도자료로 배포되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방문했던 시기는 마침 미국 실리콘 밸리를 근거지로 하는 ICRT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 활동이 10주년을 맞는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도 참여했다. “실리콘 밸리부터 삼성까지”라는 제목으로 홍콩, 중국, 한국, 대만의 사례들이 발표되었고, 이후 음료와 다과를 나누며 작은 파티가 열렸다. 70년대 처음으로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제기했던 백발의 미국 활동가들과 당면한 투쟁을 소개하는 아시아 지역의 젊은 활동가들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대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 대학-노동의 연계

우리는 그밖에도 지역의 노동안전보건 조직들을 방문하고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 중 버클리 대학의 LOHP (Labor Occupational Health Program, 노동건강 프로그램) 센터를 꼭 소개하고 싶다. 이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의 지역사회 공공 프로그램의 하나로, 1974년 미국의 직업안전보건법이 막 통과된 직후 설립되었다. 당시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 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지원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대학의 지역사회 공헌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거의 40년의 역사를 가진 이 센터는 대학, 정부기관, 공익 재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들과의 연계 속에서 다양한 실태조사, 교육, 정보와 자료 개발, 전략 수립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그곳에서 만난 50-60대 활동가 ‘왕언니’들은 젊은 활동가, 연구자들과 함께 뛰는 여전히 현역이었고, 아카이브로 구축된 자료들은 그 자체로 역사 기록물이었다.

센터는 80년대 새로운 안전보건 문제였던 VDT 작업부터 최근의 돌봄 노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노동자 건강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번 학회에서 발표한 홈케어 노동자 (home care workers) 교육 프로그램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홈케어 노동자는 한국의 요양보호사와 장애인 활동보조인 비슷한 일을 한다. 이들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저임금과 고용불안 속에서 다양한 근골격계 질환와 손상, 감정노동, 폭력 등에 시달리고 있다. LOHP 팀이 오랫동안 노동자, 고용주, 전문가, 서비스 이용자들을 토론하면서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올바른 자세나 안전수칙 뿐 아니라 환자의 가정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이용자와 어떻게 대화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을지 방안을 제시한 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이들은 노동자에 대한 교육만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뒷받침하는 캠페인, 즉 돌봄 노동자가 건강하고 안전해야 환자들의 건강과 안전도 잘 돌볼 수 있다는 ‘소비자 캠페인’을 전개할 뿐 아니라, 돌봄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한 주 입법 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적대적 관계가 될 수도, 가장 강력한 연대 세력이 될 수도 있는 돌봄 노동자와 서비스 이용자 관계에 초점을 둔 운동 방식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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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LOHP 센터가 개발한 돌봄 노동자 교육자료 소개

무엇보다도, 지역 대학과 노동운동이 안정적인 장기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구체적인 사업과 전략을 개발하면서, 후속 세대의 연구자와 활동가를 키워내는 시스템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노-학 연대’를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1) 모금을 통해 아시아 지역 활동가들에게 여비를 보태준 샌프란시스코 지역 활동가들, 학회 전후로 우리에게 안락한 잠자리를 마련해준 토드, 로라, 학회 특별행사 참가 비용을 지원해준 New Solutions 편집위원회 모두에게 지면을 통해 고마움과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또한 학회 참가 비용을 지원해준 시민건강증진연구소와 후원회원들에게도 감사한다.


2) http://ipen.org/pdfs/apha_release_31_oct_2012-en.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