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성 암환자 느는데 작업환경은 ‘이상무’
오염에 방치된 비정규직 ..’여수산업단지’ 작업환경 평가기준 없어 무방비

김미영 기자/매일노동뉴스

지난해 2월 직업성 ‘암’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한 이후 여수 산업단지의 산업재해 문제가 새삼 관심사로 등장했다. 정규직의 작업환경에만 쏠려있던 관심이 비정규직에게 옮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수 산업단지 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작업환경에 대한 조사는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노사정이 역학조사의 방안을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직업성 암으로 의심되는 비정규직의 산업재해 승인신청은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매일노동뉴스>는 여수산업단지를 찾아갔다. 노사정을 만나 역학조사의 필요성과 시행이 늦어지는 이유를 들어봤다./편집자

겨울이면 소복이 쌓인 흰 눈 위로 붉은 동백꽃이 피고, 봄이면 영취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전라남도 여수. ‘남도의 미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그러나 38년 전 지금의 GS칼텍스인 호남정유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후 ‘석유화학 국가산업단지’가 된 여수는 달라졌다. ‘오염의 도시’로 불리고 있다. 일부에선 ‘죽음의 도시’ 라고 한다.
이미 지난 19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조사에서 여수산업단지(이하 여수산단)는 유해물질 노출정도가 세계보건기구의 기준치의 수십 배에 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결국 ‘집단이주’가 필요하다는 한국과학기술원의 지적에 따라 여수산단과 인접한 삼일동 등 5개 마을이 이주지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규직만 역학조사, 비정규직은 ‘방치’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라는 여수산단으로 매일 출근하는 노동자는 190여개 업체 1만2,299명(한국산업단지공단 11월 동향보고서)에 이른다. 여기에 비정규직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2만여명이 훌쩍 넘는다. 이들 가운데 90% 이상의 노동자가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하거나, 공장과 설비를 보수하고 운송하는 일을 하고 있다.

때문에 노동부는 산업보건연구원과 여러 대학이 참여한 가운데 1997년과 2002년 2차례에 걸쳐 여수산단에 대한 대대적인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한 지역의 노동자집단에 대해 광범위한 역학조사를 시행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노동부에서 실시하는 역학조사 대상은 ‘정규직’에 한정돼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2월 광양과 여수산단 건설현장에서 20여년 간 제관공으로 일해 온 비정규직 박아무개씨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씨가 사망하기 2달 전인 2005년 12월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역학조사에서 박씨의 백혈병은 업무와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정됐다. 박씨는 비정규직 중에서 ‘직업성 암’으로 ‘산재 승인’을 받은 첫 사례로 기록됐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광양과 여수산단의 비정규직들의 건강권 문제도 관심을 받게 됐다. 사실, 광양, 여수산단의 노동자들은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일하는 과정을 보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유해물질 여부 확인도 못해

“여수산단 지하에는 1500여개 입주업체를 연결하는 파이프들이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이 파이프를 통해 원료도 지나가고, 독가스도 지나가고 온갖 화학물질이 지나가요. 비정규직 건설노동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 그 파이프들 중 노후한 것을 잘라내서 교체하고 다시 붙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파이프에 어떤 물질이 들어있는 지 전혀 모르고 작업을 한다는 겁니다.”

김행곤 여수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정규직들은 공장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파이프나 탱크 속에 어떤 물질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지만, 비정규직의 경우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일한다”면서 “때문에 비정규직의 작업환경이 훨씬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지난 2005년 백혈병으로 산재승인을 받은 배관공 최아무개씨의 경우 아날린 가스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간 동료들의 소식을 들은 이후에서야 자신이 아날린 공장에서 작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아날린은 발암물질 중 한 종류로 지난 2004년 재판부는 ‘아날린’ 취급노동자의 백혈병을 업무 상 재해로 인정한 바 있다.

더구나 비정규직 건설노동자들이 주로 공장에 투입되는 시기는 재정비·보수기간으로, 원진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따르면 이 기간의 벤젠 노출농도는 정상가동 기간보다 최고 200배 이상 높다. 연구원이 지난 2005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혈액암과 림프종을 유발하는 벤젠의 경우 8시간 노출 수준은 오히려 기존 측정결과보다 낮았으나 단시간 노출은 가장 높은 값이 741ppm으로 미국 노동부 기준인 5ppm에 비해 148배, 미국정부산업위생전문가협의회(ACGIH)기준(2.5ppm)에 비해서는 300배 가까이 높았다. 백혈병을 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진 1,3-부타디엔의 단시간 노출 수준은 최고 82ppm으로 미국 산업안전보건청 기준(5ppm)의 16배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석유화학공장의 재보수 기간 중 유해물질의 노출농도 평가는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최상준 박사는 “우리나라는 이들 발암성 물질에 대한 단시간 노출 기준이 없고 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1년에 2차례 주기적인 측정을 통해 노출기준 초과 여부만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들 물질에 대한 노출기준 제정과 석유화학장치산업의 특성을 고려한 작업환경 평가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광양·여수산단 노동자들이 직업성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도 작업환경 평가는 언제나 ‘이상 없음’으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체에 치명적인 ‘석면포’쓰고 작업

더구나 현행법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김행곤 여수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현행법에서는 재보수 기간 중에 투입되는 건설노동자에게 어떠한 물질이 있는 공정인지 설명하고, 보호장구 착용과 노출 시 대처방법 등을 숙지시키도록 되어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지켜지는 사업장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김 국장은 “공사현장 앞에 ‘ㅇㅇ공정’ 달랑 딱 한 줄 쓰여 있는 게 유일한 안내”라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공장 보수기간을 노동부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지만 신고된 내용과 실제 공사기간이 다른 경우가 많아 이조차도 신빙성이 없다고 밝혔다.

비정규직에게 지급되는 보호장구 역시 별다른 게 없다. 배관공에게 필요한 가죽장갑 한 짝이 전부인 상황이다. 오히려 용접공의 경우 법으로 사용이 금지된 석면이 지급되기도 한다. 용접 시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용접공 주변을 에워싸는 비석면제품의 방염포를 써야하지만, 가격이 석면에 비해 5배 비싸다는 이유로 일부 전문건설업체에서 석면을 지급한기도 한다.

여수건설노조 한 관계자는 “여수공단 주변 공구사에 가면 판매할 경우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지는 석면포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귀뜸했다.

지난해 9월 폐암으로 산재 판정을 받은 정아무개씨는 30년을 용접공으로 일한 비정규직이다. 정씨는 25년 가까이 흡연을 했지만 용접 작업 중에 폐암 유발 물질인 크롬과 니켈에 노출 및 석면노출 등을 이유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았다.

비정규직 직업병 역학조사 제자리걸음

비정규직 건설노동자의 산재승인이 잇따르자 노동부는 지난해 6월 여수산단과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직업병 역학조사를 실시키로 결정했다. 이번 역학조사를 맡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여수산단 29개 사업장과 광양제철소 1개 등 총 30개 발암성 물질 취급 사업장 의 정규직, 협력업체 노동자, 건설일용직 등 2만1000명을 대상으로 내년 10월까지 작업환경측정 등 역학조사를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학조사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연구원은 지난해 9월과 올 1월 2차례에 걸쳐 역학조사 실시와 관련한 노사정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포스코를 비롯한 사용자측은 “역학조사 협조지원이라는 목적이라 해도 노조의 개별사업장 출입은 물론 참여 및 참관은 허용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작업환경측정을 통해 파악할 자료에 대해서는 측정횟수 및 시료갯수가 충분히 계획되어야 하며 일부항목에 대해서는 기업측과 동시측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는 “사측의 주장은 노조의 참여를 배제한 채 기업 입맛대로 노출평가를 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면서 “하나마나한 역학조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민주노총 광전본부는 “특히 비정규직의 경우 소음성 난청, 호흡기 및 피부질환을 비롯해 근골격계질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암 외에도 직업성질환으로 조사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연구원측은 ‘역학조사 시 노조의 참여는 필수’라며 사측의 주장에 대해 반대의견을 밝혔으나, 예산문제 등을 이유로 노조의 조사대상 확대 요구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2차례 걸친 노사정 간담회는 아직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연구원측은 2월 말 경에 노사 대표를 다시 불러 한 번 더 의견조율에 나서겠다는 계획이지만 노사 간 의견 차가 워낙 커 절충점이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민주노총 광전본부는 직업성 암으로 조사대상을 한정할 경우 아예 역학조사에 참여하지 않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이처럼 여수·광양 역학조사 방안을 놓고 노사정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과정에서 지난 1월 3명의 비정규직이 각각 백혈병과 갑상선암, 간암 등으로 산재신청을 접수했다. 이 가운데 간암 환자의 경우 이미 사망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고농도의 발암성물질에 노출될 경우 백혈병과 폐암의 잠복기간은 10~20년가량이다. 광양·여수산단이 80년 이후 급성장한 사실에 미뤄볼 때 앞으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목숨을 잃을 지 그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 특히 그동안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해온 비정규직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대책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