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석면의 위험을 무시해도 되는가?
방관주의가 낳은 엄청난 재앙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마르렌 퇴겔스ㆍ니코 크롤스

지금도 여전히 독성에 대한 충분한 진단 없이 석면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그런데, 석면 관련 제품의 유해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되기 까지는 십여 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석면의 비극을 멈추기 위해선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이 석면 물질을 접촉하기 이전에 무해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절대 필요하다.

유럽연합(EU)은 이미 1962년에 석면의 발암위험성을 경고했지만, 2005년에서야, 석면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석면 사용금지가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전적으로 벨기에와 스위스의 합작회사인 에테르니트(Eternit)사1)와 같은 석면-시멘트 생산 대기업들2)의 로비와 유럽 국가들의 방관적 태도 탓이라고 할 수 있다.3) 현재, 일부 EU국가들은 기업이 석면 노출에 대한 위험성을 직원에게 충분히 고지하지 않은데 대한 법적 책임을 묻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기업을 상대로 제기된 최근 소송에서 기업들은 석면의 위험성을 몰랐다고 주장하였다.4)

하지만 프랑스 릴의 형사합의법원은 2006년 4월의 판결에서 알스톰 파워 보일러사에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직원들을 석면에 노출시켰다는 이유로 7만 5천유로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것은 법원이 기업의 과실죄에 대해 부과할 수 있는 최고형이다.

기소를 당한 전 사장은 징역 9개월의 집행유예와 3천유로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 또한 민사법원은 이 회사에 대해 150명의 직원에게 각각 1만 유로씩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 이탈리아 시실리아에서 에트르니트사의 고위 간부 8명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이들은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도 역시 같은 회사의 벨기에와 스위스 간부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석면은 내구성과 경제성이 좋은 광물로 캐나다, 러시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여전히 채굴되고 있다. 석면의 수익성을 알고 있었던 기업들은 석면을 이용해 슬레이트, 직물, 브레이크, 단열재와 같은 수천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였다.

하지만 의사들은 일찍이 석면으로 인한 대형 사고를 예고했었다. 근로감독관이면서 의사인 드니 오리보는 이미 1906년에 석면의 유해성을 확인하고 칼바도스 지역의 콩데 쉬르 누와호(Cond?sur-Noireau) 인근에 있는 방적 공장과 직물 공장의 근로자들이 진폐증, 폐결핵, 폐경화증 증세를 보인다는 진단을 내렸다. 오리보는 특히 이 공장의 근로자 50명이 사망한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먼지 흡입 시스템을 설치하면 이러한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근로시찰 보고서에 그가 발견한 사항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와서야 유럽의 석면기업들은 예방 대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석면이 발암물질이고, 위험이 없는 노출 수준을 알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책은 불충분하였다. 게다가 70년대에는 석면을 이용한 제품 생산이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업들은 석면의 유해성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이 유해물을 생산, 판매하였다. 1962년부터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는 독일,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6개 회원국에 직업병 리스트와 함께 권고 사항을 제시했다. 유럽공동체관보5)에 발표된 이 리스트에는 석면침착증 뿐만 아니라 폐암까지 포함되어 있다.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가 참고한 전문가 보고서는 석면에 노출되었을 때의 위험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보고서는 ‘섬유 시멘트(에터니트)의 가공과 생산, 단열 방음 공사’ 등과 같은 주요 위험 요인들을 열거하면서 석면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된 근로자들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1966년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는 이 보고서가 정부 관공서, 민간 기관, 노사 단체, 촉탁의, 대학에 까지 널리 배포되도록 권고했다. 보고서는 “집행위원회가 석면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려서 간접적이지만 폭넓게 직업병 예방에 기여하고 의사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6)”라고 명시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처음으로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석면 생산이 부분적으로 금지되었고, 2005년부터 유럽연합에서 석면 생산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렇게 석면 사용금지의 오랜 지체는 오늘날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현재 석면 공장의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공장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까지도 사망한 상태이다. 오는 2029년에는 서유럽에서 석면으로 인한 석면침착증이나 폐암 그리고 늑막염으로 죽은 사망자 수가 5십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7) 피해자들은 석면 공장의 근로자들만은 아니다. 피해자들 중에는 석면공장에서 전혀 일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운 좋게도 반세기 동안 기업들이 석면을 계속해서 생산,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유럽국가에서 동시에 사용된 판매 전략과 치밀하게 짜인 로비활동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석면 문제에 정통한 네덜란드 변호사 로브 루에르는 어떻게 기업들이 석면의 위험성을 무시해왔는지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미 1929년과 1930년에 석면이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세계적 기업들은 석면-시멘트 기업연합을 구성해 결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업들은 세계 석면 시장을 ‘작은 국가연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터너 앤 뉴월 (Turner & Newall)사의 1929년 연례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같은 해, 석면기업들은 석면과 석면 침착증과의 관계라는 주제로 열렸던 국제노동기구(ILO)의 토론에도 참석해 자신들을 변호했습니다. 그 이후 이들은 늘어나는 공격에 계속해서 맞서고 있습니다. 매번 기업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입장을 방어하고 있습니다8).”

석면 기업들은 과학자들의 연구를 좌절시키기까지 했다. 1965년에 호흡기 전문가로 유명한 프랑스인 쥐드 튀리아프는 석면생산자조합에서 문전 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병에 걸린 한 근로자를 대상으로 늑막암의 원인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튀리아프의 연구사례는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1960년대 초에, 호흡기 전문의 이리빙 세리코프는 석면이 폐암과 늑막암을 발병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내놓았다. 1964년 뉴욕과학아카데미는 의사 세리코프와 야콥 처그의 주재 하에 석면의 생물학적 영향에 관한 국제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석면의 유해성을 좀 더 확실하게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회의 보고서가 발표되고 난 후, 석면의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세리코프는 기업들에게 석면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석면에 대한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의 이름은 과학 잡지와 서적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다. 기업들의 내부 문서에 따르면 세리코프의 이런 활동으로 인해 기업들은 그를 위험 인물로9) 여겼다. 1964년 개최된 국제회의 이후 미국 다국적기업인 오웬스 코닝사는 다음과 같은 내부 문서를 공개했다: “현재 우리의 관심사는 세리코프로 하여금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해 총매출액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10)

과학적인 공격에 저항한다

1971년 11월 24일, 25일 이틀 동안 런던에서 열린 석면관련 국제회의에서, 석면 회사들은 그들이 취해야 할 공동 전략에 대해 논의 했다.11) 석면정보위원회의 회장인 F. 하우는 참석자들에게 더욱 엄격한 법을 제정하는데 협조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협조하는 것이야 말로 강력한 조치를 방해하고 규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우는 “석면사용 반대가 강해질 것이 예상된다.”면서, 참석자들에게 “행동위원회 구성을 통해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이기 위한 공동행동안을 채택하자”고 촉구했다.

석면사용을 찬성하는 기업들이 사용한 광고 전략은 같은 시기 담배 제조 회사들이 사용한 광고 전략과 아주 흡사하다. 이들은 힐앤놀튼(Hill & Lnowlton)과 같은 홍보 회사의 도움을 받았다. 프랑스인 피해자 측 변호사 장-폴 테소니에르는 “석면 생산회사들이 이번 회의에서 언급되었던 사항을 100% 현실화 시켰습니다. 1977년 프랑스에 도입된 규제는 1966년에 영국에 도입한 규제보다 엄격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인 피해자 단체들은 프랑스 법을 ‘살인허가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최근 몇 년간 많은 소송들이 잇따르면서, 석면기업의 내부 문서가 파헤쳐졌다. 이 문서를 통해서 ‘석면-시멘트 기업연합’은 과학자들과 노동조합 그리고 언론과 정부에 대응 전략을 세우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등 비양심적 행동을 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에테르니트사의 벨기에와 스위스 책임자들이 유럽 지역을 대상으로 계획한 회의 일정 중에는 항상 ‘석면과 건강’이라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1979년 10월 29일 파리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한 석면기업 대표들은 “유럽에서 근로자들과 노동조합, 소비자와 정치인들에 맞서 다양한 분야에서 로비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석면제조업체들이 대체 상품을 찾아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기업도 석면을 포기해선 안 된다.”12)고 강조했다.

1981년 2월 24일 이들 기업은 유럽 환경교육위원회(CEE)의 공세에 맞서 취해야 할 전략을 브뤼셀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대부분 참석자는 석면 회사가 유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또한, 만일 자신의 선거구에 있는 석면 공장을 중시하는 유럽의회 의원이 있다면, 그들을 적극 포섭한다는 다짐도 했다. 물론, 건축가, 연구소, 공공 기관, 석면 제품 사용자 등등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한 다양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견해다.13)

석면 기업들은 국가별 특성에 맞게 다양한 투쟁 방법을 동원해 유럽 지역의 석면금지 속도를 지체시킬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0년에 석면 반대 노조운동이 시작됐다. ‘이탈리아노동총연맹’(CGIL)의 조합원인 니콜라 폰드라노는 24살부터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석면에 대해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저는 출근길에 장례 행렬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습니다. 카살레(Casale) 공장은 이미 황폐화되어 근로 환경이 형편없었습니다. 저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 한지 두 달이 지나서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석면의 위험성에 대해 근로자들을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계 수단이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근로자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일 때문에 죽는다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노동자들은 거의 스무 번이나 로마로 가서 이탈리아 의회와 관련 부처 건물 앞에서 야영을 하면서, 석면 반대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필터와 마스크 그리고 좀 더 위생적인 근로 환경을 요구하면서 장기 파업에 돌입했다. 결국 파업으로 인해 생산은 지연되었다. 노동자들은 1992년 석면사용금지법이 채택될 때까지 파업을 강행했다. 이탈리아노동총연맹의 브루노 페세 전위원장은 “우리는 석면 피해자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금 지불을 에테르니트사에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도 조합과 근로자들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맞서서 대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카살레 공장 피해자 가족들은 라파엘 가리니엘로 검사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 그는 이미 5년 전 토리노 재판소에서 시작된 석면 관련 소송 때부터 석면 문제와 관련한 에테르니트사의 고위 책임자들의 유죄 사실을 입증할 확실한 증거 자료를 수집하여 왔다.

여러 해 동안 석면 피해자들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변호사 세르지오 보네또는 “벨기에 재계의 거물이자 에테르니트사의 회장인 루이 드 카르티에 드 마르시엔느는 스위스 에테르니트사의 토마, 미트하이니와 함께 매우 심각한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고소되었습니다. 저는 소송까지 가기 전에 양측이 타협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모든 재정상의 거래에 대해 검사가 반대한다면, 그런 소송은 반드시 진행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피해자들에게 재정적 보상을 하면서 타협하기를 원합니다. 이 사건에서 주요 핵심 인물들인 경영인들이 구속되는 것은 우리에게 별 이익이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는 피해자들이 원만히 타협 해 재정적 혜택을 받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10명의 에테르니트사 피해자들을 포함해서 약 1,500명의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준 변호사 보브 루에르 (Bob Ruers)는 결코 쉽지 않은 소송 과정을 설명해준다.

“보상금은 쉽게 얻어 진 것은 아닙니다. 공장 노동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행한 자신들의 일이 비난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설득 끝에, 1989년 고르(Goor)공장의 피해자 부인 3명이 에테르니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회사 측은 먼저 보상금을 제안했고, 피해자들은 그 제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소송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러나 거의 매번 에테르니트사는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1999년 에테르니트사는 소송에서 너무 많이 지자 결국에는 포기하고 피해자들에게 타협을 제안했습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소송을 제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기업은 4만 8천유로가 넘는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고 물질적 손해에 대해서는 추가로 2만 유로까지 보상금을 지불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나서 몇 년 뒤, 에테르니트사는 옛 노동자들의 가족들에게 타협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6개월 이전, 이 회사는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피해자들과도 몇 가지 문서조항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왜 유럽에서 석면 문제는 최근까지도 정치 의제로 다뤄지지 않은 채 오점으로서 남는 것일까? 분명, 석면 문제에 스위스와 벨기에가 관련된 것은 우연히 아니다. 이 두 나라는 슈미트하이니와 엠센스, 두 재벌가가 공동 경영하는 에테르니트사가 기반을 두고 있는 곳이다.

에테르니트사의 주주들은 옛 귀족 출신들로, 벨기에 재계의 중심인물들이다. 엠센스 일가는 이미 20세기 초에 벨기에 궁정에서도 존경받는 재벌가였으며, 현재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있다. 에테르니트사의 역대 간부 중에는 엠센스 일가 출신들이 많다. 루이 바론 드 카르티에 마르쉬엔느, 장-마리, 스타니슬라스, 클로드 엠센스, 폴 장셍 드 림펜스 등이 대표적이다.

불투명하고, 봉건적인 경영이 횡행하는 에테르니트사는 이텍스(Etex) 그룹처럼 아직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지 않다. 이 그룹의 최고 경영진들은 노동자들 보다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벨기에에서 석면과 연관된 병에 걸린 노동자들만이 직업병 기금에서 주는 보상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독립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나 피해 노동자 가족 그리고 공장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최근에 발표된 일련의 기사들로 인해 논쟁이 시작되었다. 벨기에 정부는 오는 2007년부터 매년 석면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1천만 유로를 할애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부 혼자서 기금을 부담할 것인지 아니면 석면 제조기업들도 함께 분담할지에 대해서는 의회 토론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벨기에에서 만일 석면 관련 ‘사건’에서 정부와 기업의 공동 실수가 거론된다면, 이전의 석면 제조기업들은 보상금 문제와 관련해 노동자들을 크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조 사이에 채결된 협정에 따라 직업병 기금에 도움을 청하는 노동자들은 기업의 의도적인 잘못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기업 경영자를 법정에 소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 건의 민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신중의 원칙’의 교훈을 얻어야

스위스의 상황도 벨기에와 비슷하다. 스위스에서 슈미트하이니 일가는 엠센스 일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토마와 슈테판 슈미트하이니 형제는 스위스 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슈테판 슈미트하이니는 주요 기업들의 대주주다. 그는 스위스항공과 네슬레, 금융그룹인 스위스 연방은행(USB), 다국적기업인 아세아 브라운 보베리, 그리고 스와치사의 이사회를 주관해왔다. 그리고 토마 슈미트하이니는 시멘트 회사인 홀심을 관리해왔다. 스위스 에테르니트사의 전 회장이었던 슈테판 슈미트하이니는 석면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지속적인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14) 하지만 스위스 에테르니트사 현 경영진은 지난 10월, 자신의 병이 이 회사 석면과 연관된 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병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재단 기금은 90만 유로로 제한되어 있다.

물론, 많은 소송과 보상금 요구가 유럽 석면 문제를 종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청난 양의 석면을 주택뿐만 아니라 산업지역이나 공공건물에서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전에 석면 회사들이 정화 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 결과, 시민과 기업, 그리고 정부가 ‘폐기물’을 처리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만일 그 당시, 기업들이 ‘신중의 원칙(사전주의의 원칙)’을 알고 그것을 적용했었다면 석면으로 인한 피해자 수가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기업들과 유럽 국가들이 과연 이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었는지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에서 석면사용이 점차적으로 금지되자 기업들은 그들의 기계 설비를 개발도상국에 팔거나 라이선스를 허가했다. 2005년 9월 23일, 24일 양일간 개최된 석면 관련 유럽의회 회의에서 ‘벨기에석면피해자연합회’(ABEVA) 회장 자비에 종크헤레가 언급한 것처럼, 석면은 ‘문어발 같이’ 전체 지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럽에서 사용 금지된 석면은, 앞으로 노동법의 구속력이 없고 보호 대책도 거의 없으며, 기업의 로비 활동이 활발한 곳에서 허용될 가능성이 높다.15)

현재, 활발하게 석면 광산을 채굴중인 캐나다가 그 끔찍한 역할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마, 캐나다는 석면이 고갈되기 전까지는 채굴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1) 20세기 초에 루드위그 해츠세크 (Ludwig Hatschek)에 의해 개발된 방법으로 석면의 섬유질과 시멘트를 혼합한다.
2) 에테르니트(Eternit)는 특허로 소유주가 다른 기업들에게도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3) 벨기에, 영국, 프랑스에서는 1990년대부터 석면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4) 다음을 참고하라. 파트릭 헤르만 (Patrick Herman), 안니 테보모니(Annie Thebaudmony) 《석면 기업들의 범죄 전략》( ≪ La strategie criminelle des industriels de l’amiante ≫) Le Monde diplomatique, 2000년 6월.
5) 유럽 환경교육위원회의 권고 사항 (≪ Recommandations de la Commission de la CEE ≫) 관보 80호 (1962년 7월 23일)
6) 관보 147호 (1966년 7월20일)
7) Hesa Newsletter, 브뤼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있었던 유럽공동체의 첫발표를 인용
8) 보브 루에르 (Bob Ruers), R. F., 니코 슈텐 (Nico Schouten), (The Asbestos Tragedy : Eternit and the Consequences of 100 Years of Asbestos Cement, 네덜란드 사회당, 2005년 7월.
9) 1971년 석면 섬유 연구소(ATI)에서 있었던 회의 보고서 발췌
이 회의에서는 셀리코프(Selikoff) 박사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토론을 벌임. 바리 캐스트레맨 (Barry Castleman)에 의해 인용, 석면: 의학적인 측면과 법적인 측면(Asbestos: Medical and Legal Aspects), 출판사 아스펜(Aspen ),뉴욕, 2005, p. 593.
10) 오웬스 코닝(Owens Corning), 캐슬맨 (Barry Castleman)의 앞의 책에 발표된 내부 문서
11) 내부 문서≪석면에 대한 정보 기구들의 국제회의≫, 런던, 1971년 11월 24-25
12)《검토 회의 보고서》, Paris, 1979년10월 29일
13)《검토 회의 보고서》, Bruxelles, 1981년 2월 24일
14) www.stephanschmidheiny.net

필자소개:저널리스트 (벨기에), 파스칼 데크로스 (Pascal Decroos)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프랑스 사법기관의 인식 전환

유럽에서 석면 관련 피해자들은 공소 시효로 인해 형사 소송 제기가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상황은 다르다. 변호사 장-폴 테소니에르는 “현재 사법경찰 특별 수사팀이 석면 회사들과 관련 부처들을 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동료 변호사 실비 토파로프와 함께 석면 피해자 약 7천명의 이익을 변호하고 있다. 그는 “1년 전부터 보건 문제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예심 판사들이 석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해 기술적 노하우와 능력을 갖춘 사법경찰 특별수사팀과 공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컨대, 오딜르 베르텔라 조프와 판사는 에이즈오염 혈액 파동 당시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유명한 만큼, 석면문제도 적극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다.
토파로프는 “이전에 사법기관들은 고용주들이 석면 먼지의 유해성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선, 사법기관들이 석면 문제와 관련된 기업들과 경영자들을 고소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 사법기관들은 정부와 고용주들이 잘못을 저질러졌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즉, 사법기관들은 고용주들이 석면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근로자 보호를 위한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고 인식한다. 토파로프는 이러한 사법기관의 인식 전환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고 오랜 투쟁을 통해서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2004년과 2005년에는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부인들이 3주마다 된케르크와 두에 법원 주변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법원 판사들이 재판 (2003년 12월 26일)과 상소심(2004년 6월 15일)에서 석면 사망사건이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발언하자, 그녀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피해자 가족들의 항의 시위가 프랑스 전체를 흔들어 놓으면서, 진행 중인 법적 소송들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토파로프는 “사법기관의 인식 전환은 이전부터 예상된 것이었다. 또한 클로드 고트 교수는 1997년과 1998년 정부의 용역 보고서를 통해 석면 산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상원과 하원의 위원회들도 부정적인 보고서들을 내놓았다. 1997년부터 석면피해자들이 기업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수천 건의 민간소송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테소니에르와 토파로프는 매년 수백 건의 소송사건에서 대부분 승리하고 있다. 테소니에르는 “현재까지의 모든 소송은 이전의 석면 기업들을 상대로 하고 있다. 우리의 소송작업은 전 고용주들에는 나쁜 소식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법률은 현재 유럽 국가 중에서 석면 피해자들을 가장 잘 보호하고 있다. 법적 규정상, 피해자들은 보상기금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피해자들에게 유리하다. 법적 소송의 경우, 피해자들이 석면 공장에서 일을 했고 자신들이 석면에 노출됐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개, 프랑스 법은 석면 소송에서 고용주의 책임을 묻고 있다. 고용주들이 석면의 유해성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보호하는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2005년 12월, 프랑스 정부가 석면 유해 물질로 오염된 고물 항공모함 클레망소를 인도에서 폐기하기로 한 결정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오래전부터 프랑스, 이집트, 인도의 비정부 단체(NGO)들은 프랑스가 유독성 폐기물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은 국제 의정서나 조약에 어긋난다고 비난해왔다.1) 결국 2006년 2월 15일 참사원은 클레망소의 인도행을 중시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홍해를 떠돌고 있는 2만 7천 톤짜리 고물선의 귀환을 발표했다.

유럽의 좌파 연대는 2006년 4월 28일, 석면 피해자들과 보건 전문가들, 그리고 NGO들의 견해를 담은 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2)
“평등과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해, 인간은 좋은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 버려진 아주 위험한 물질이 평가되는 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사용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또한 선진국이 오염된 선박을 개발도상국에 헐값에 판다는 것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1)<석면: 기업들의 탐욕으로 의한 인간 비용>,Gauche unitaire europeenne-Gauche verte nordique(GUE-NGL), Bruxelles,2006
2)같은 책.

2007년03월01일 ⓒ민중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