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인 주택용품 전문 매장인 로우스(Lowe’s), 셔윈 윌리암스(Sherwin-Williams), 홈디포(Home Depot)가 염화메틸렌(methylene chloride 또는 dichloromethane)과 N-메틸피롤리돈(N-Methyl-2-Pyrrolidone, NMP)이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를 내년부터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시민단체 ‘안전한 화학제품, 건강한 가족(Safer Chemicals, Healthy Families, SCHF)’가 진행해 온 ‘매장 책임(Mind the Store) 캠페인’의 영향 덕분이다. 이는 소비자 건강 보호 운동의 중요한 성공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캠페인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번 해외이슈에서 현재까지의 경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휘발성 화학물질인 염화메틸렌, 용매(솔벤트)인 NMP는 페인트 제거제나 코팅 제거제 등의 주요 성분 중 하나이다. 미국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에 따르면, 해마다 6만 명의 노동자와 200만 명의 소비자가 이들 물질에 노출된다고 한다. 이들 물질에 노출되면 암을 비롯한 만성적 건강 영향뿐 아니라 급성 독성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 사용하면 질식 위험이 있다. 염화메틸렌의 경우, 고농도에서 마취효과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는 의식을 잃고 호흡이 멈추게 된다. 또한 염화메틸렌은 체내에서 일산화탄소를 발생시켜 흡연자에게 심장 마비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60명 이상이 페인트 제거제를 이용한 작업 중 질식사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사망자에는 노동자뿐 아니라 10대 청소년을 포함한 소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EPA는 오바마 행정부 임기가 끝나기 직전인 2017년 1월 12일에 염화메틸렌과 NMP에 대한 사용 제한 규정안을 발표했다. EPA는 이들 물질들이 페인트나 코팅 제거제로 사용될 경우 예기치 않은 위험(unreasonable risks)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염화메틸렌은 중추 신경계, 간, 신장 독성, 암 등을 유발하여 노동자와 소비자의 건강에 해를 끼치고 사망을 유발할 수 있으며, NMP가 함유된 제품으로 페인트/코팅을 제거할 경우 신경, 면역, 생식 독성 피해를 입을 수 있고 특히 임산부와 태아 발달에 유해할 수 있다는 위해성 평가 결과가 있다고 밝혔다. 당시 EPA는 소비자용 또는 상업용 페인트/코팅 제거제로 염화메틸렌과 NMP를 제조하거나 가공, 유통하는 것을 등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안하면서 2017년 4월 12일까지 의견 수렴 후 최종안을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2017년 1월 20일,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규제 완화가 정책 기조로 자리잡게 되었다. EPA는 염화메틸렌과 NMP 규제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업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가졌다. 페인트 제거제 제조업체와 수출입 업체들은 일자리 감소, 대체 물품의 인화성 위험 등을 이유로 새로운 규제에 반대했고, 제품에 경고 문구를 강화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예정대로라면 새로운 규제에 대한 결론이 났어야 할 시기를 훌쩍 넘긴 이후에도, EPA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발표를 미루었다. 페인트 제거제에 대한 EPA의 규제 계획은 구체적 일정을 밝히지 않은 채, 현재까지도 기약 없이 중단된 상태이다.
EPA가 사용 제한 규정안을 제안했던 2017년 1월 이후 이와 관련하여 4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소비자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EPA의 무책임한 행태에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이들은 염화메틸렌과 NMP가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 판매 금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페인트 제거제에 함유된 유독성 화학물질들의 건강 영향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제품 금지를 위한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더불어 이들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업체들에게 제품 판매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 2017년 10월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거주하는 31세 남성 드류 윈이 소매점 로우스(Lowe’s)에서 페인트 제거제를 구입하여 바닥 제거 작업 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로우스에 염화메틸렌 함유 페인트 제거제를 금지하라는 청원 운동이 벌어졌고 20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2018년 2월, 펜실베이니아의 31세 남성 죠슈아 엣킨스가 염화메틸렌이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를 이용하여 BMX 자전거를 손질하던 중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금지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5월 초, 옹호단체들은 로우스 매장 앞에서 전국적인 “행동 주간 (week of action)”을 진행했다. 소매업체를 겨냥한 판매 금지운동은 최근 들어 결실을 보이고 있다. 2018년 5월, 로우스는 염화메틸렌과 NMP가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를 올해 안에 매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6월에는 미국 최대의 페인트 관련 제품 소매업체인 셔윈 윌리암스와 세계 최대 주택용품 소매점 체인 홈 디포가 잇따라 같은 약속을 발표했다. SCHF는 월마트, 머나즈, 에이스 하드웨어 등 다른 대형 소매업체들도 이러한 금지에 동참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소매업체들의 금지 약속을 이끌어낸 “매장 책임(Mind the Store)” 캠페인은 포괄적인 화학물질 정책 수립을 위해 미국의 주요 소매업체들과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비영리 단체인 SCHF가 주도하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대형 소매업체들이 유독 화학물질이 포함된 제품들의 판매를 금지하고, 안전한 대체 물질들을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캠페인을 주도하는 SCHF는 450여 개 조직의 연합 단체로서, 환경운동가, 보건전문가, 기업 등 다양한 영역의 개인과 조직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번에 소매업체들에게서 염화메틸렌과 NMP가 함유된 페인트 제거제 판매 금지 약속을 받아 낸 것은, 정부가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마냥 기다리기보다 직접 행동을 통해 제품을 시장에서 퇴출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EPA의 규제 정책 도입에 긍정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