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에 앞서 『현대조선잔혹사』라는 책을 냈어요. 조선소에서 일어나는 산업재해를 다룬 책인데요, 당시에 취재를 하려고 조선소에 위장취업을 했어요. 멋도 모르고 갔죠. 작업현장이 너무나 열악했어요. 일하다 정말 죽을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제가 일했던 곳이 조선소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었어요. 직원은 30명 정도였고요. 그때 당시 제가 34살이었는데 그 30명 중에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나머지 직원들은 거의 20대 중·후반이었죠. 궁금했죠. ‘이토록 위험한 현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의문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후마니타스 펴냄)의 저자 허환주 기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이중화된 노동구조 안에서 가장 열악한 곳으로 내몰리는 열여덟 현장실습생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프레시안, 후마니타스, 알라딘 주최로 2020년 1월 17일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북토크, ‘김용균 이후를 말하다’가 열렸다. 책의 저자인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와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패널로 참여했고 전수경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이 사회를 맡았다.


일 시 : 2020년 1월 17일(금) 오후 7시 30분

장 소 :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 바실리오홀

사 회 : 전수경(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저 자 : 허환주(프레시안 기자『열여덟, 일터로 나가다』저자)

이야기 손님 : 김미숙(김용균재단 이사장, 김용균의 어머니)

녹취 및 정리 : 한지훈(노동건강연대 상임활동가)

17일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북토크가 열렸다. ⓒ프레시안

 

전수경 : 안녕하세요. 오늘 사회를 맡은 전수경이라고 합니다.

먼저 왜 제가 진행을 맡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자면, 이전부터 노동자 사망 문제에 대해서 계속 활동을 해왔던 노동건강연대라는 단체에서 일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제도개선안을 만드는 ‘안전사회국’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구요. 사회적 참사와 재난이 노동자 사망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자리에서처럼 ‘김용균이 이야기’나 ‘일터로 나간 열여덟 살의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런 활동을 해온 사람을 찾다 보니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 같습니다.

먼저 김용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까요? 오늘 이 자리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도 조금 편하게, 여러분들의 이야기도 들을 것이니까 좀 편안하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용균 1주기가 지난 달이었잖아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김미숙 : 저는 지금까지 용균이의 죽음을 놓고 죽음에 대해 파헤치고,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규명을 하고 지금은 합의한 내용이 현장에 제대로 이행되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고 있어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많은 활동을 해서 그 아픔을 덜 생각하고 살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계속 용균이의 죽음을 생각하다보면, 빠져 들어서,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게 될까봐, 활동을 계속해야지 나중에 책임자 처벌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전수경 : 지금 1주기 지나면서, 여러 언론에서 인터뷰 등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주로 받으신 질문이 어떤 것이었나요? 기억에 남는 질문이나, 기억에 남는 행사가 있으셨나요?

김미숙 : 보통 시작은 지금처럼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 보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1주기가 되고 태안에 내려갔는데,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가서 행사를 하게 되었어요. 사실 태안을 가고 싶지 않아요. 그 자리에 가는 것도 너무 싫지만 태안이라는 장소가 아들이 사고가 났던 장소라서 말만 들어도 좀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요. 이번에 가서, 조형물 설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사측이 여러 꼬투리를 잡아서 못하게 되었거든요. 가서 사측 만나고 따지고 싶었는데 정작 하지도 못하고 왔고, 여러 가지로 태안에 내려갔던 것이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전수경 : 태안에 내려갔을 때, 용균이 친구들은 만났나요? ‘아들 친구들이 있는 현장이 아직도 깜깜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 현장은 어떤가요?

김미숙 : 친구들 만났죠. 광화문에서 천막치고 계속 활동으로 함께 봐서 광화문에서 주로 많이 만났어요. 태안에서는 다른 동료들도 많이 만났죠. 같이 일했던 동료 말고도 많은 동료를 만났어요. 태안에 있는 현장에 갔을 때, 동료들이 한 말이 ‘자기들 일하는 곳 안에도 험하지만, 바깥에도, 정규직 다니는 가로등이랑 비정규직 다니는 가로등이랑 밝기가 확실히 차이 난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부분도 그렇게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래서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에 대해 차이를 두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그렇게 돼 있어요.

전수경 : 저도 작년에 석탄화력발전소 조사위원회에서 발전소에 같이 조사를 나갔는데요. 정면에 불빛이 밝은 본관 건물이 있고 그 뒤에 용균 씨가 일하던 곳과 같은, 탄광과 같은, 석탄이 옮겨지는 곳이 있었어요. 그 두 장소가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어 시스템이 있는 앞부분이 석탄이 모여지는 곳과 하나의 회사라고 하면 회사인데 그 안에서 서로 어떻게 일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되어 있다는 것에 저도 놀랐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을 것 같지만, 사고 소식을 처음 전해 듣고 가셨던 현장의 느낌을 여쭤볼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미숙 : 처음 갔던 태안화력발전소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어요. 원래 유가족은 사고 당하면 그날의 기억에 멈춰져 있잖아요. 현장 안은 지금 시대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시대의 모습이 놓여 있다는 것. 안에 상태가 너무 열악했어요. 컴컴하고 분진이 눈처럼 많이 쌓여있고, 그리고 회전체가 속도도 빠르고 위력도 세요. 그렇게 센데 회전체가 다 노출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깜깜한 밤에 일할 때, 손전등이 안 비쳐지는 곳에 옷이라도 낀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잡아줄 사람이 없이 혼자 일하니까요. 원래 이런 위험한 일은 2인 1조로 일해야 하지만 혼자 일하니 그런 것이죠.

용균이가 일하는 건물은 15층 높이 건물이에요. 9·10호기로 나름 신식시설이라고 했어요. 15층까지 용균이가 올라가면서 컨베이어벨트를 확인하는 작업이 있고 낙탄을 퍼 올려 치우는 업무와 이상 소음이 들리면 확인하는 것도 했다고 해요. 이상 소음이 있을 때 회전체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확인을 위한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 컨베이어벨트가 쌩쌩 지나가는데 회전체도 노출되어 있고 그곳을 확인해서 손전등으로 비춰 사진을 찍어 보내주어야 해요. 그런데 분진도 많이 날리기 때문에 깨끗하게 사진을 찍으려면 최대한 다가가야 하기에 용균이가 그렇게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위험한 상태에 일하는데 풀코드라는 안전장치는 외부에 있어요. 위험할 때 정지시킬 수 있는 줄이 평소에 느슨하게 풀려있는 상태이고, 그 안에서 작업하는 사람이 사고가 날 때 누군가 바깥에서 풀코드를 잡아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인데 용균이는 혼자 작업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진을 찍어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에 보내야 한다는데 새벽에 보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문제가 있을 때, 다단계로 여러 번에 걸쳐서 허락을 받고 지시를 받아야한다는 것이 풀코드라는 것은 무용지물이고 보여주기 식이라는 것이죠. 누군가가 왔을 때 우리에게 이런 안전장치가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도라고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어요. 그리고 1층에서 15층까지 몸을 구부려서 컨베이어벨트가 회전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엄청 많았어요. 그곳들을 용균이가 낙탄 처리나 이상 소음 확인 등을 하면서 점검하며 다닌 것이죠. 제가 거기를 간 목적은 용균이가 왜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들어갔어요. 그런데 갔는데 풀코드라는 것은 원래는 축 늘어져 있었는데 가서보니 짱짱하게 잘 감겨 있었고 그리고 현장바닥은 용균이가 사고가 났을 때와 다르게 분진가루가 많이 있어야 하는데 물청소로 깨끗하게 청소해 두었어요. 아무도 왜 사고가 났는지를 모르게 은폐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냥 이 곳에 기자들을 다 데리고 와서 모든 것을 까발리고 싶었어요. 이렇게 열악한 현장이 있고, 60~70년도에 멈춰 있는 듯한 탄광과 같은 모습이 그대로 옮겨져서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렸으면 했어요.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 이따위로 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곳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들은 너무 열악하게 일하고 죽고 다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 진상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김용균의 죽음은 업무수칙을 다 지켜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나왔어요. 그리고 “원청은 하청을 주었으니 책임이 없고 하청은 내 사업장이 아니니 권한이 없다.”라고 해서 비정규직은 사각지대에 있어 더 열악한 곳에 일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현장에서 28번이나 위험한 현장에 시정 요구를 했으나 돈이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다 묵살시켜서 위험한 상황에 대해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만약에 그때 조금이라도 원청이 조치를 취했다면 용균이 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8년 동안 12번이나 산재 사망 사고가 있었는데 3번 정도는 산재 은폐를 했고, 8년 동안이나 산재 사고가 났으면, 고용노동부에서 수사를 해서 시정 요구를 하고 확인도 하고 했으면 이러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죠.

고용노동부가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니 인력부족 때문이라고 했어요. 인력이 부족하면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어느 정도 늘렸지만,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했어요. 그런 소리 듣겠다고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본 것인데 안 되는 이유만 설명하려 하느냐고 물었어요. 자신들이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기획재정부에서 돈이 나오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잘 안 되고 있다고 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로 잘 하고 싶지만 못하고 있다고 핑계를 계속 대고 있는데, 저는 용균이가 사고 난 후에야 한 해에 2400명 정도가 죽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듣고 나서 너무 깜짝 놀랐고, 사측이 저를 만나서 용균이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모습에 누명을 벗기려고 시작을 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고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안전하지 못한 곳에서 사망하고 나라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비정규직으로 수만 명이 죽어간 상황이 너무 놀라웠고, 지금 바뀌지 않으면 계속 이러한 죽음이 반복된다는 것이죠.

저처럼 집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민주노총과 같은 곳을 TV를 통해 보면 맨날 싸움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시끄러운 사람들 아니면 “동지 동지” 이런 말을 쓰니까 빨갱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가지고 거부감이 있었어요. 너무 다른 세계였어요. 내가 알았던 세계는 밝은 세계. 겉보기에는 너무 휘황찬란한 우리나라로 되어 있는데, 알고 보니 비정규직이 자기 권리를 못 찾아서, 어쩔 수 없이 저도 비정규직이었지만. “비정규직이니까 이런 거야”하고 따라가기만 하고, “정치와 나는 거리가 먼 거야”하고 생각하고 살아서 알고도 모르는 척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용균이 아빠가 10년 동안 병이 있어서 일을 못하는 상태라서 집안을 꾸려나가려면 돈만 열심히 벌고 우리 가정만 잘 지키면 되겠다고 하루에 2교대를 하며 12시간씩 일하고 살았어요. 어디다 눈을 돌릴 틈도 없이 살았던 거죠. 그래서 정치와도 거리를 두고 인권에 대해서도 “있는 사람들이 인권도 말하고 사는 거지”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인권이나 정치는 내가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지켜지지 않고 누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치라는 것이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그게 결국 용균이가 죽게 된 이유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에요.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프레시안

 

전수경 : 지난번에 잠깐 어머니를 뵈었을 때 길에서 활동하는 다른 인권활동가들에 비하면 아직 신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아직 거리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해요. 그래서 말씀을 너무 잘하게 된 것도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발전소에 갔을 때에도 김용균 씨처럼 하청업체에 있던 분들을 쭉 면담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들이 본관 건물로 들어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전소 원청에서 근무하는 분들과 한 번에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분들이 일하는 환경에서 노동에 지쳐있는 모습이 아주 좋은 본관 건물과 대비되었는데 그분들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봐라 이렇게 좋은 건물에서 공간도 넓고 책상도 좋은 책상 쓰는데 우리가 일하는 공간에는 휴게소도 없고 화장실도 없다.” 스스로 말씀도 하시고 발전소 내 사무직이나 일하는 분들은 아예 석탄이 이송되는 곳에는 한 번도 안 가보신 분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서로 분리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 존재를 몰랐던 것이 김용균의 죽음을 통해 알려졌고 어머니가 알리고 계신 것 같아요.

조사위원회 이야기까지 하셨는데, 만나 보신 정치인들이 참 많았을 것 같아요. 제일 높은 분이 누구셨나요?

김미숙 : 대통령을 만났고요. 비서실장도 만났고. 많이 만났어요.

전수경 : 지금은 만나기 어려우신가요?

김미숙 : 제가 만날 일이 있으면 찾아갈 입장은 되고요.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할 일 없이 그 사람들 찾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전에도 그랬지만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면, 우리나라 대통령이지만 그냥 만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이 사안에 대해서 얼마나 성의 있게 할 것인가를 확인하고 만나야 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요구를 전달했고 요구한 내용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먼저 이야기 해달라고 하고 만난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그리고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만날 거예요.

전수경 : 어제가 김용균법이라고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시행되는 첫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오늘 광화문에서 하루 종일 계시기도 했지만, 사실 대통령을 처음 만나서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기억하고 계신 것들이 어떤 것이 있으신지.

김미숙 : 제 자식은 이 세상보다 중요한 자식이었다고 이야기 했고 자식이 엉망으로 방치된 세상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이 내 가슴에 불덩어리가 되어 타오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어떻게든 풀어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안전 때문에 국민 중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때 상황이 10명 정도가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갔는데 정치인들과 대책위 분들이 들어갔는데 30분 정도 시간을 준다고 했어요. 저보고 먼저 이야기하라고 해서 다른 분들도 이야기해야 할 것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짧게 이야기 했는데 나중에 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해서 저는 용균이가 죽은 것이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데 도와달라고 그랬어요.

전수경 : 처음에 국회에 어머니가 가셔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했을 때, 그때 제가 썼던 글이 있어요.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국회의원들이 어머니께 와서 감사하다고 하는 글을 보고 정치인들이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뒤집힌 세상이 되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어머니는 사실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에 재단도 만드시고, 올해가 전태일 50주기이기도 한데,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김미숙 어머니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어떠신가요? 부담되기도 하실 것 같은데요.

김미숙 : 사실 이소선이라는 분이 전태일의 어미니라는 것을 몰랐어요.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그런 말씀을 많이 물어봤어요. 이소선 어머님은 이런 길을 걸어왔는데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등등 관련한 내용을 물어보는데 저는 말할 것이 별로 없었어요. 전태일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말만 알고 있었거든요. 이소선 어머니가 그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들었고, 지금도 아직은 잘 모르고 있어요. 잘 찾아보지 못해서요. 앞으로는 시간 날 때 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는 것이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자식을 보내고 자식의 유지를 받들어서 사신 것이고, 저는 저 나름대로 용균이한테 나중에 갔을 때 할 말이 있을 정도로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수경 : 잠시 앞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사전에 말씀을 드리지는 않았는데 여쭤보려던 것이 있었어요. 용균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는지 그리고 뜻은 무엇인지요.

김미숙 :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데요. 처음에 몇 가지 이름을 가져왔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요. 왜냐하면 용균이 사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용균이는 네 번째 아버님 밑에서 태어난 손자에요. 좋은 이름들은 다 다른 쪽이 가져가고 별로 고를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르고 고르다가 두 번째 아버님께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말을 했고 그래서 새로 받아온 이름이 용균이에요.

이름의 뜻이 무엇이냐고 하니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좋은 이름이라는 설명을 듣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녹일 용, 고를 균’이에요. 그래서 가족의 화목에 보탬이 되려나라는 생각을 하고 받아 들였어요. 무엇을 녹이고 무엇을 고르지 라는 생각을 의아해 하다가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하나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용균이가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죽을지는 몰랐어요. 저는 이름이 사람에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명이 짧고 험악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알았다면 그런 이름을 짓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전수경 : 분위기를 약간 전환해보려고 했는데, 용균이라는 이름도 아프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입사하고 몇 년 다니고 나면 정규직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고 들었는데, 입사하고 준비하고 그 후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나요? 당시에는?

김미숙 : 사실 용균이는 4년제 대학교를 보내달라고 했었어요. 집안 사정이 안 돼서 2년제를 다니고 4년제 나온다고 해서 딱히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고용 형태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들어갈 수 있는 폭은 넓다고 생각해서 용균이와 함께 논의를 해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일하다 마음에 안 들면 편입해서 4년제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제가 그렇게 하지 말고 자기가 원했던 생각대로 했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안 벌어졌을까하는 생각을 해요.

이러나 저러나 다 자책이 들어요. 이러면, 저러면, 안 죽었을 건데 라는 마음이 계속적으로 들어서 그래요.

전수경 : 다른 산재사고 유가족들도 자주 만나고 하시는데 다 비슷한 생각을 하거나 그러시나요?

김미숙 : 네. 유가족들 만나면 만나는 자체가 많이 위안이 되어요. 웃고 있어도 뻔히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처참할 정도로 마음이 아프거든요. 내가 죽으면 차라리 낫겠다. 자식들이 살아날 수 있다면 목숨이 하나도 안 아까울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 아픔이라는 것이 정말 너무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에요. 그 깊이가 너무 커서. 그래서 유가족들 만나면 죽은 아이들 이야기를 많이 해요. 좋았던 이야기 하며 그 당시로 돌아가요. 우리 아들은 이랬어. 자식에 대한 기억이 하나라도 잊어질까봐 두렵거든요. 기억하는 것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만나면, 일반 사람들은 만나면 우리처럼 우중충한 이야기하기 뭣하니까 밝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서로 불편해 하죠. 그래서 유가족끼리 서로 기대게 되는 것이죠. 서로 위안된다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전수경 : 집회에서 어머니가 용균이 어릴 때 불렀던 자장가를 불러준 기억이 나요. , 언론이 너무 많이 어머니의 우는 얼굴을 찍고 기사에 썼잖아요. 지하철에서도 사람들이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이러며 아는 척도 하고 했다고 들었는데. 계속 울고 있을 수는 없고 식사도 많이 해야 힘도 나고 누구랑 드잡이 할 힘도 생기고 화를 내기도 할 텐데. 사람들 앞에서 참아야 하는 게 힘들지 않으셨어요?

김미숙 :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저분이 나에 대해 얼마만큼 아는지 모르니 그냥 행동과 말투에 따라 대처를 하게 되죠. ‘그냥 TV에 나온 적이 몇 번 있어요’ 라고 말하거나 많이 아시고 다가오신 분들은 ‘속상하지만 잘 마음을 다스려라’하는 경우도 있고요. ‘자식을 마음에 묻고 살아라’라는 분도 있어요. 그런 말 들으면 속상해요. 저는 아직 얼마 전 일 같은데 그런데 그분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들이 직접 겪지 않은 일이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큰 상처는 안 받아요. 댓글 같은 것도 올라오면 크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아요. 자식 팔아먹니, 얼마나 더 그럴 거니 할 때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고 말아요. 나라가 엉망이니까 이런저런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해서요. 댓글부대도 있잖아요. 그렇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아요.

전수경 : 댓글까지 읽어보고 계실 줄이야. 여러분 질문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질문을 통해서 이야기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상이 엉망이다 보니’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어디가 그렇게 엉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미숙 : 아들이 사고가 나고 이틀이 지나서 현장에 갔을 때, 엉망인 상태를 보았고 발전소뿐만 아니라 조선소 등 안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어서요. 왜냐하면 다 하청으로 되어있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다 다르다 보니까 일하는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은 시키는 사람들에 말에 따라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니까요. 조선소에 일하는 사람들 중 신나로 닦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용접하는 사람이 있어요. 조선소는 공사 기간이 정해져 있고 급하다보니 시키는 일들마다 각각에 하청을 주다보니까 동시에 신나로 작업하는 사람과 용접하는 사람이 일하게 되었고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는 거죠. 실제로 불이 났고 2층에 소화기가 있어서 비정규직이 소화기를 사용해서 불을 껐는데 관리직원이 와서 “이런 사고 일으키면 징계 때릴거야”라고 다음부터 일 못하게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얼굴 다 그을리면서 열심히 불을 진화했는데 사측의 부조리를 본 것이죠.

또 건설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저에게 편지를 쓴 것을 보았는데 자기는 고공에서 일하는데 안전줄이 나일론 끈 하나에 의지해서 일한다고 해요. 발판도 탄탄한 것이 아니고 잘못 밟으면 삐그덕거려서 떨어질 수 있는 그런 발판이었는데 한 번은 떨어질 뻔해서 마음 가라앉히고 겨우 일했다고 해요.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산업재해가 이해가 안 간다고 해요. 자기네들은 너무 철저하게 대책을 세워두었기 때문에 떨어져 죽는 일이 없어서 “왜 추락해서 죽어?”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해요. 그런 것처럼 우리나라는 안전 대책이 너무 안 세워져 있어서 떨어져 죽는 것도 비일비재하니까 사람들이 생각도 “원래 그랬어. 우리나라에서 일하다 죽는 게 한 두 번이야?” 이런 상식이 돼버리다 보니 이런 죽음은 늘상 있는 것이고 “원래 그래도 돼” 이런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죠.

전수경 : 지금 말씀하신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으셔서 어머니께서 재단을 만드시게 되었고 재단 대표를 맡고 계신데 이 말씀을 듣고 나서 허환주 기자와 이야기를 이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재단 만들고 몇 개월 지났는데 최근에 어떤 사업을 하고 계신지를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학생들이 교육도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재단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김미숙 : 재단은 안전하지 않은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에요. 지금 비정규직이 자기 권리를 못 찾고 있잖아요. 저는 처음에 용균이가 일한 현장에 들어갔을 때, 너무 위험한 현장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딸려 들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현장이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을 하다가 계속 일하다 보면 인식을 잘 못하게 된다고 해요. 또 발전소는 1호기에서 10호기까지 있는데 용균이가 죽기 1년 전 즈음, 산재 사망이 있었는데 은폐되어 모르다가 용균이 사고로 인해 드러났다고 해요. 그렇게 위험한 현장을 왜 모르나 했더니, 사고가 나도 몰래 빼돌리면 서로가 모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냥 일하게 되는 거구요. 그리고 안전 교육이라는 것이 3일 동안 사전에 교육한다고 하지만, 15층 높이를 3일간 일 가르치고 하다 보면 하는 일이 많다보니 일하는 방식만 배우는 것도 힘든 상태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가 어렵죠. 용균이 동료 중 한 명은 처음에 일을 배우고 길을 잃어 한참 동안 헤매다 내려온 적도 있다고 해요. 용균이도 3일 교육을 받았지만 안전 관련 교육이기 보다는 실제로 일하기 위한 교육만 받고 인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일에 바로 투입된 것이죠. 용균이가 사고가 났고, 12월 10일 저녁 10시 45분 쯤 사고가 났는데 혼자 일하다 보니 다음날 새벽 3시가 넘어서 발견되었어요. 아무리 찾아도 컨베이어벨트 철책 안에 있으니 발견이 어려웠던 거죠. 그렇게 발견됐는데 사고 수습도 되기 전에 멈춰뒀던 옆 라인을 다시 가동했어요. 아침 7시 넘어서 시신 수습을 하고 했다는 것이 이것은 너무…. 저에게는 소중한 자식인데 그 속에서도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하는 것이구나. 짐승도 이렇게 취급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에 그 생각을 하면 너무 심각하다. 말도 안 되고 기가 막힌다는 표현으로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인간이 아닌 행동인 것이죠.

전수경 : 혼자 글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하고 싶은 말씀이 지금처럼 많고 잘하시는데 다 풀리지 않아서, 그래서 글을 쓰시게 되셨어요?

김미숙 : 글은 원래 처음에는 분하고 억울하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지고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밖에 잠을 못자고 계속 깨는데 울다가 지치다가 자고 하다 보니, 억울함도 표현 못하겠고 하다가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시를 쓴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폰에 다가 나의 마음을 적어두면 좋겠구나 라는 생각에 계속 쓰게 되었어요.

전수경 : 지금까지 말씀해주신 김미숙 어머니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오래 기다려주신 허환주 기자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환주 :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취재하면서 봤던 사람들 이야기를 말 할 수 있는데, 어머니께서는 직접 경험하신 내용을 말씀하시니까 다르게 와 닿는 것 같아요. 취재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수경 : 안 그래도, 책 제목이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이렇게 되었으니까, 왜 열여덟이 아닌 사람이 엷여덟의 이야기를 써야 되고, 열여덟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당사자들이 더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이 우리는 아직 많지 않고 열여덟의 이야기를 누군가 해주었으면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제가 10대 공장 알바 이렇게 구글에서 해 봤어요. 알바 경험담도 많고 특성화고 고등학생들이 쓴 경험담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중에서 제가 가장 기억 남는 것이 선생님이 취업 시즌이 되어서 빨리 취업하라고 해서 핸드폰 조립 공장에 갔더니, 딱 두 가지를 회사에서 물어봤다고 해요. “1번 질문 : 질병은 있나? 2번 질문 : 사고 친 적은?” 없다고 하니 “합격”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허환주기자의 책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왜 기획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물어보도록 할게요.

허환주 : 2016년도에 『현대조선잔혹사』라는 책을 썼어요. 조선소에 위장취업을 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는데, 석탄화력발전소보다는 덜 열악하지만 저의 두 눈으로 본 조선소의 모습은 무섭고 살벌한 곳이었어요.

저는 작은 조선소 공장에서 하청의 하청의 하청에서 일을 했어요. 거의 3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일을 했어요. 그 때 34살이었는데 제가 가장 나이가 많았어요. 저의 선입견이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용균이 친구들이 다 20대 초반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제조업이나 이런 쪽은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하청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거꾸로 정규직들이 나이가 굉장히 많고 하청에서 일하는 쪽이 굉장히 젊어요. 팀장이 30살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용균씨와 달리 제 옆에 사수가 있었어요. 관심병사처럼 2인 1조로 항상 일을 했었는데 사수가 특성화고 출신이었어요. 그 친구가 사연이 되게 많았어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올까 궁금했어요. 이처럼 위험한 현장에 대해 알고 오는 것일까. 알고 온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는 것일까라는 것이 이 책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수경 : 직접 사고를 목격하거나, 사고 위험을 겪은 적이 있으셨나요?

허환주 : 제가 진짜 죽을 뻔 했죠. 정말 죽을 뻔 했죠. 아까 어머니께서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발만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죽을 수 있어서 심호흡을 하고 일을 한다고 하잖아요. 조선업도 비슷한 것이 족장(작업 발판)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것이 있어요. 꼭대기에서 일을 하면 아파트 10층 높이 정도이고 땅바닥이 다 보여요.

거기서 일을 하는데 앉아계신 책상 정도의 좁은 폭인데 여기를 왔다갔다 하는데 안전난간이나 안전망 이런 것은 없고 발을 헛디디거나 하면 세상과 안녕 하는 상황인 것이죠. 그러니까 저는 아침에 7시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창원에 허름한 여관방에서 일어나면 한숨이 나오는 거예요. 아 진짜….

딱 그 생각이 드는 것이에요. 내일 출근을 하면 돌아와서 잠을 여기서 잘 수 있을까? 어느 날 점심을 먹는데 같이 일하는 분들이 수군수군 거리는 거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옆 동에서 일하는 여성분 한 분이 일을 하시다가 족장에서 떨어진 거죠. 6m 높이에서 떨어져 반신불수가 된 거에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 무서운 것이죠. 어쩌자고 내가 이곳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에 조선소에 들어가면, 오늘도 무재해 몇 일 이런 간판이 있어요. 거기에는 사망 0, 재해자 0, 오늘도 무재해 681일 이렇게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조선소에는 사고나 사망이 한 번도 안 일어난 것에요. 그런데 사고가 난 것을 우린 다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음날 출근하면 다시 그 간판에 적혀있는 내용이 0일부터 돼서 시작되겠지 했는데 682일 이렇게 넘어가 있는 거죠. 하청 노동자가 다치면 숫자나 데이터는 어디에도 없고 그 사고 현장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일을 하게 되는 구조가 당연하듯이 되어 있었어요. 어머니는 분노와 같은 감정을 많이 느끼셨겠지만, 저는 그냥 무서웠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의 저자 허환주 기자 ⓒ프레시안

전수경 : 그 무서움이 아직도 전해지는 것 같아요. 무사고 몇일 이런 것은 정규직만 계산되도록 되어있는 것이죠? 그걸 알면서도 고용노동부가 인센티브를 주고, 제도를 시행해왔던 것이고 무사고 일수를 더 채우기 위해서 외주화를 더 가속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요. 말씀 들으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대형 조선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왜 정규직 중요하고 왜 숙련공이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지금 막 이렇게 신입이 들어가서 저 모퉁이를 돌면 미끄러운 지점이 있다, 이런 암묵지, 즉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는 안전에 대한 지식, 저 곳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머리를 숙여서 가야한다, 이런 사실을 오래 일하신 분들을 알고 있는데 신입이 들어왔을 때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죠. 잊어버리기도 하면서요. 직원들이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위험한 현장을 계속 지속시키게 만드는 것도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조선소 이야기를 더 하고 싶겠지만,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현장실습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는데, 이게 인력사무소냐 학교냐 하는 표현도 보셨을 것이에요. 현장실습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왜 이 제도를 책 한 권을 통해 다루었는지 바로 여쭤 보겠습니다.

허환주 : 조선소에서 제가 만났던 사수나 저보다 나이가 어렸던 친구들은 그 지역 특성화고를 졸업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조선소에 들어오는 루트는 현장실습이 대부분이었어요. 이 현장실습은 이번에 취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현장실습제도가 박정희 시대부터 있던 거였어요. 1964년에, 우리가 이른바 1970년대 산업역군을 만들어 내고 사회에 안착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현장실습이 이용되어 왔더군요.

제가 현장실습으로 책을 쓴 것은, 산업재해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1년에 2000명이 넘게 죽는 현장이 있고 현장도 분화되어 있죠. 위험의 외주화로 인해서. 정규직은 좀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고, 비정규직, 하청은 열악한 곳에서 일을 하고 있죠. 그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게 만드는 장치가 현장실습 제도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아이들을 갈라치기하면서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로 나눠져 가게 하는지를 추적해 가는 형식으로 택했던 것 같아요.

전수경 : 기자님 본인의 에피소드가 중간 중간 나오는데 특별히 그 내용들을 넣은 이유가 있나요?

허환주 : 저는 별로 넣고 싶지 않았는데 출판사에서 넣으라고 자꾸 말해서 책이 무겁고 딱딱하다고. 농담이구요. 중3때 인문계, 자연계, 특성화 등 분화되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누구나 나의 친구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같은 곳에서 공부했던 같은 꿈을 꿨던 친구들이었음을 명시하고 싶고 지금은 흩어져서 다른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도 나와 같은 존재였음을 인지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수경 : 책을 보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을 찾아서 만나기가 사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학생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겠어요? 그리고 책 안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허환주 : 제가 특성화고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특성화고도 계급화 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특성화고면 공부 못하는 쪽이 간다는 이미지였고 현장실습을 통해서 사회로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취재를 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소위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상위권이라는 즉, 중학교 때 내신 10% 안에 드는 친구들이 노력해서 들어가는 학교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만난 인상적인 친구도 그런 친구였어요. 집안이 굉장히 안 좋은데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특성화고등학교를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안에서 큰 벽을 만난 것이죠. 그 안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쉽지 않은 거죠. 이 친구는 중학교 때 10% 안으로 성적을 받았던 친구인데 특성화고 진학 후 함께 만난 친구들은 다 그런 친구들이고 고등학교 안에서는 노력만으로 경쟁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 고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는데 부모들의 엄청난 지원과 선생님들이 케어하는 구조 그리고 반별로 나누는 것, 얼리버드 반이라고 해서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반도 있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 친구는 엄청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 안에서 도태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집안의 지원이 없으면 그 이상으로 넘어가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 안에서 거의 놓아버리는 식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는데, 사회에 나갔는데 사회에서도 대학 졸업자와 차별을 받는 거죠. 그런데 자기가 볼 때는 자기가 실무적인 능력도 나은데 진급도 다르고 급여도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결국 이 친구가 선택한 방식은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교를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국사회 정말 뭐 같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전수경 : 마이스터고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잖아요. 책에서 주로 특성화고가 일반 고등학교와 다른 것이 공장에서 학교로 다시 돌아올 때 낙인같은 것이 있다고 했고, 대학을 가지 못하게 막는 교사 그리고 취업률이 우선인 학교 등 많이 이야기 해주셨는데 실습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어땠는지를 같이 이야기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허환주 :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는 상위권인 특성화고 관련 이야기면, 실질적으로 제가 취재하고 싶었던 중·하위권 특성화고에 있는 아이들은 거의 제가 취재 했을 때는 학교도 그냥 방치하는 것 같고 부모도 방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에서도 케어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성적이 안 되니까 집안이 어려우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이나 해야지 그런 의미로 선택 아닌 선택인 것이죠. 그렇게 들어가서 고등학교 2년 지내다가 취업을 위한 현장실습도 하는 것이죠.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몰라요. 그냥 학교에서 가라고 하니까 가는 것이죠. 친구들이랑 교복입고 떡볶이 사먹고 웃던 아이들이 바로 다음날 9시까지 각을 잡고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죠. 회사에 가면 50대 사장님, 40대 부장님, 30대 대리를 만나고 공장에서는 육중한 기계들이 기름칠이 먹어 있는 장소에서 일을 해야 해요. 아니면 100명 넘게 있는 콜센터에서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전화만 받아야 해요.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려고 하면 어디 가냐고 혼나고 시말서 쓰라고 이야기해요.

현장에 가서 견디기 어렵죠. “학교로 돌아가겠다“ 하죠. 그러면 학교에서 난리가 나요. 너는 사회부적응자다. 너는 루저다. 학교에 있을 필요도 없다 모욕감을 줍니다. 명찰을 원래는 흰색 명찰을 달아야 하는데 빨간 명찰을 달게 한다거나 교무실에 가서 하루 종일 서 있게 한다는 등으로 말입니다. 여러 방식으로 괴롭히는 것이죠. 나는 모자란 애인가? 나는 잘못된 애인가? 문제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시스템으로 되는 것 같아요. 이게 현장실습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수경 : 학생들 산재 사망 사고가 나면서, 현장실습의 조건을 엄격하게 하고 1~2년 정도는 현장실습을 가는 것이 확 줄었다고 하는데 작년에 취업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교육부가 방향을 잡았다고 들었어요.

허환주 : 이명박 정부가 학교를 엄청 채찍질 했었어요. 특성화고 취업률이 80%까지 갔었어요. 영세 사업장에까지 아이들을 다 현장실습 보낸 거예요. 그러니까 사고가 나죠. 영세 사업장 같은 경우, 근로감독이 되겠어요?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없애버렸어요.

문제는 학교나 일부에서는 나는 고등학교를 취업하러 왔는데 취업을 막으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문제는 그런 사업장에 보낼 때 안전하고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된 다음에 보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도 취업률을 높여야하니 ‘선도 기업’이라는 것을 만들어요.

선도 기업이라는 것은 안전하다는 것을 보장하면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안전하다고 보장한다는 것이 기준도 모호하고 현장에서는 어떻게 판단하지도 제대로 기준이 없는 상황인 것이죠.

전수경 : 우리나라 공장 어디에도 어떤 산업체도 안전하고 직장 내 괴롭힘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업장이 많지 않은데 학생들을 안전이 보장되었다거나 사업장 중간 관리자가 교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제도를 교육부에서 만들어 놨는데, 그 사회 밖의 별세계라는 것이 존재할 수는 없잖아요. 일반적 노동 현장을 뛰어넘는 학습이 가능한 사업체라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직업교육을 할 것인가 질문이 다시 돌아갈 수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북 콘서트 신청하실 때 짧거나 길게 한마디씩 남겨주신 말들을 봤어요. “우리는 노동자나 아이들이 열악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애써서 외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외면하고 있었을까?” 이렇게 질문을 하셨어요.

허환주 : 왜 시스템이 이렇게 가고 있을까? 그 이유를 질문해보면 “편하니까”라는 것이죠. 편의점에 굉장히 싼 음식이 나왔어요. 그러면 좋아하잖아요. 음식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열여덟살 아이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곳에서 일을 해서 만드니까 이 가격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구의역 사고를 생각해보면, 지하철표가 1300원이에요. 굉장히 싸요. 외국에 어느 나라든지 비교해보면 싼데, 더 싼 가격이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이 가격이 어떻게 측정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우리나라 전기 가격이 싼 편이에요. 전기 가격이 어떻게 측정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 안에 김용균 씨가 있었죠. 불편하고 어렵지만 계속 들여다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미숙 : 저는 다른 생각인데요. 학생들이 자기가 월급을 얼마를 받아야하는지 몰라요. 가장 싼 가격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니까 값싼 노동자들을 써요. 월급을 용균이 같은 경우, 원래 520만원인가 그러는데 받은 돈은 220만원이에요. 제일 싼 가격의 노동자를 찾아서 중간에서 착취하는 방식으로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이죠. 전부 잘 살고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잘 사는 사람만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살 수밖에 없죠.

가진자들이 없는 사람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면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빼버리고, 권리보장과 인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아예 빼버렸어요. 일반 시민들이 무슨 법을 만들거나 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제대로 알고 정치인들에게 대응해야지 그래야 우리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수경 : 말씀 감사드립니다. 내가 있는 현장은 어떠한지를 말씀해주실 분이 계실런지요?

청중1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이 정말 필요한데, 한편에서는 책에서 나왔던 현장실습생 문제가 안전한 일자리와 관련한 것도 있지만 학력과 관련된 차별 그리고 학교에서는 어쨌든지 다른 어떤 이유라도 돌아올 수 있을 때 막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청중2 : 댓글 읽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1주기가 되도록 너무 많은 일들을 겪으셨는데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 어떤 것이 마음아픈 이야기들인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수경 : 먼저, 기자님이 현장실습에 대한 보완책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환주 : 지금은 누구 책임도 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근원적으로는 학교는 교육을 그리고 기업을 훈련을 시키는 방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전수경 : 안전교육의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언론이 사고가 난 후에 기자들이 하는 질문이 안전교육을 받았냐는 것이에요. 결과적으로 안전교육을 받았다면 노동자의 부주의로, 그리고 안 받았다고 해도 노동자의 부주의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구조를 보게 하는 교육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문제인 것 같아요. 사고가 일어나는 구조를 보는 교육은 성인이나 아이들이나 다 필요한데 전적으로 개인에 대한 책임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보니까 구조를 보는 눈은 학교가 아니면 어디서 할 수 있겠습니까.

김미숙 : 시민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봤어요. 제가 아이가 자라고 있다면 밖에 나가면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으면 해요. 사회인의 되기 전에 내가 가지는 권리가 무엇이고 권리를 어떻게 찾는지에 대해 학교가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학교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안전교육이나 자기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기 자식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

전수경 : 마음 아프게 하는 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시느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김미숙 : 저는 사람들이 삶이 다 다르니까, 불우한 사람들도 있고 다양한 삶이 존재해서 그냥 당연히 여러 상황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말을 해오는 사람들의 말을 그렇게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악인도 있고 좋은 사람도 많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최악에 있는 사람들을 더 보살핀다면 더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수경 : 화를 내시면 오히려 편할텐데 너무 담담하게 세상이 그렇다고 말씀해주시니 더 죄송해집니다.

허환주 : 산업재해 취재를 십 년 넘게 해왔는데 너무 외로웠어요. 저수지에 돌 던지는 것처럼 변화도 없고 그랬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게 된 것을 보면서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잖아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잘 모르고. 하지만 기차는 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같은 분이 계시고 활동하시고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 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