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폐증 판정 ‘하늘에 별따기’…환자 등치는 브로커
3만명 앓는데 3천명만 입원 가능 ‘제도 허점’
모집책 동원 환자모아…건당 수천만 ‘꿀꺽’
환자들 “요양판정 받기위해” 쉽게 유혹빠져
“돈 없고 배경 없으면 입원도 못해” 하소연

탄광이 문을 닫고 광부들이 떠나면서 가뜩이나 황량해진 강원도 일대 탄광촌이 ‘진폐 브로커’의 성행으로 더 검게 멍들고 있다. 오랜 탄광 생활로 얻은 진폐증에 고통받는 고령의 환자들은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는 제대로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 절망의 기침을 토하고 있다.
브로커 통해 장애 등급 올린 김씨=강원 정선군 함백광업소에서 광부로 12년 동안 일하다 1982년 퇴직한 김아무개(71)씨는 퇴직 당시 진폐장애 11급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2000년대 들어 해마다 근로복지공단에 장애 등급 재심사를 신청했다. 더 높은 등급을 받을 경우 정부로부터 장애 보상비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헛수고만 되풀이하던 김씨에게 지난해 말 브로커가 접근했다. 브로커는 김씨에게 500만원의 ‘착수금’과 장애 보상금의 30%에 해당하는 ‘성공 보수’를 요구했다. 해마다 ‘해당 없음’ 판정을 받는 데 지칠 대로 지친 김씨는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올해 초 김씨는 장애 5급 판정을 새로 받았다. 장애 보상금 7800만원 가운데 2천만원은 브로커의 몫으로 넘어갔다.

브로커에게 연락해보니= <한겨레> 취재진은 진폐환자 가족을 가장해 김씨가 전해준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직접 연락을 해봤다. 명함에는 ‘서울 서초동 ㅇ법률사무소 ㄱ사무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브로커는 대뜸 “누구로부터 소개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김씨로부터 소개를 받았다는 말에 브로커는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먼저 진폐환자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한 뒤 진단서를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는 “장애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건당 300만∼500만원의 착수금과 30%의 성공 보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태백과 정선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브로커는 5명을 웃돈다. ㅇ법률사무소 ㄱ사무장, ㄷ노동상담소 ㄱ사무장, ㅈ법률사무소 ㅂ사무장 등이 이곳에서 주로 활동하는 브로커들이다. 주응환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회장은 “보통 브로커 한명이 5∼6명의 환자모집책을 데리고 다니며 진폐 환자를 끌어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브로커를 쓰지 않으면 …= 12일 저녁 강원 태백시 상장동의 낡은 연립주택. 2층 구석에 자리한 김광옥(81)씨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쇳소리를 내면서 울리는 기침소리가 집안을 찢어놓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는 거동에 지장이 없었으나, 현재는 몸 상태가 나빠져 걷기조차 어려운 김씨가 방 한구석에 누워 있었다.

김씨는 10년 가까이 태백지역 탄광에서 석탄을 캐다가 1985년 퇴직했다. 그는 지난해 8월 병원에서 입원 요양 대상인 폐기종 진단을 받았지만, 최종 심사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정상’으로 판정했다. 결국 김씨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호적상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도 제외돼 현재는 끼니조차 잇기 힘들다. 김씨는 “주변에서 브로커를 통해 입원하게 됐다는 소리를 들으면 돈 없고 백 없는 내 자신에 더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브로커가 들끓는 이유= 전문가들은 혜택을 받으려는 ‘수요’는 넘치는데 보상과 요양 등 ‘공급’은 부족한 점을 든다. 장애 등급 판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고, 전체 진폐환자 수에 견줘 정부가 수용하는 입원환자 수가 극히 적다는 것이다.

한국진폐재해자협회는 “지난해 말 현재 진폐환자는 3만여명에 이르지만 공단의 요양 판정을 받아 입원이 가능한 환자는 3천명 정도에 불과하다”며 “요양 판정을 받지 못해 집에서 요양하는 이른바 ‘재가 진폐환자’들이 전국적으로 2만7천여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성희직 한국진폐재해자협회 후원회장은 “정부가 ‘엿장수 마음대로’식의 엉터리 판정을 일삼아 진폐환자 사이에서 불신이 높다”며 근로복지공단에 공정한 장애 심사를 촉구했다. 주영수 한림대 교수(산업의학과)는 “소수의 환자들만 입원을 해서 각종 혜택을 받다 보니까 진폐환자들이 브로커를 통해 요양 판정을 받으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가 진폐환자들은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고 △근로복지공단의 공정한 장애 판정 △재가 진폐환자 생활보조비 지급 △입원 환자와 동일한 휴업급여 지급 등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