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적 소견’보다 ‘엑스선사진’이 우선?
박영만(변호사·산업의학 전문의)
매일노동뉴스/김미영 기자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에 따르면 노동자가 업무상 질병에 걸려 4일 이상 요양이 필요한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요양급여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는 진폐증을 포함해 특정 질병을 업무상 질병 요양대상에서 제외하거나 그 요양범위를 제한하는 규정은 없다.
산재법에는 없는 진폐증 환자 요양기준
산재법령에 따르면 ‘진폐증’이란 먼지를 흡입함으로써 폐장 내에 병적 변화를 가져오는 질병을 말한다. 의학적으로 진폐증은 노동자가 작업 중 들이마신 먼지가 폐에 침착되어 폐조직에 염증과 섬유화(흉터)를 일으키고, 이 때문에 기침, 가래, 호흡곤란 등이 나타나는 만성호흡기질환을 의미한다. 폐조직에 발생한 섬유화 병변(진폐병변)이 커지면 흉부엑스선사진에는 특징적인 진폐음영이 나타난다. 임상에서는 환자가 △많은 먼지에 노출된 직업력이 있고 △호흡곤란 등 증상이 나타나며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음영이 있으면 진폐증으로 진단하게 된다.
그런데 산재법에는 진폐증 환자의 요양기준에 대한 규정이 없다. 다만 산재법의 하위규정인 시행규칙에서 그 기준을 정하고 있다. 노동부장관이 정한 산재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진폐증은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음영 밀도가 국제노동기구(ILO) 분류법상 제1형 이상인 자가 활동성폐결핵이나 폐암 등 합병증이 발생한 경우만 요양급여 지급대상이 된다.
다른 질병과 차별받는 진폐증
노동자의 질병이 업무상 발생했다는 사실만 증명되면 원칙적으로 산재법상 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노동부장관은 유독 진폐증에 대해서만 합병증이 발생하는 등 다른 추가적인 요건을 갖추어야 요양급여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진폐증 노동자는 먼지에 대한 노출이 중단되더라도 폐조직이 원상으로 회복되지 않으므로 기침, 가래 등에 대해 계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국회에서 만든 산재법은 업무상 사유로 질병에 걸려 4일 이상 치료가 필요한 모든 노동자에게 요양급여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부장관은 이러한 산재법에 어긋나게, 시행규칙으로써 진폐증과 다른 업무상 질병을 차별하여 진폐증 노동자가 요양급여를 지급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임상의학적으로 ‘진폐의증’도 ‘진폐증’
또다른 문제는 진폐증과 진폐의증 간의 차별이다. 산재법 시행규칙상 ‘진폐의증’이란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음영 밀도가 국제노동기구 분류법상 제1형보다 낮은 경우를 말한다. 즉 진폐의증은 임상의학적·병리학적으로 일반적인 진폐증과 구별되는 특정한 유형의 진폐증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라 단지 산재법 시행규칙에서 흉부엑스선사진 소견만으로 일부 진폐증을 구분한 용어이다.
보통 말하는 ‘재가진폐환자’란 대부분 이러한 진폐의증 환자이다. 진폐의증도 직업력과 증상 등 요건을 갖춘다면 임상의학적으로 진폐증에 해당한다. 진폐증 발생에는 먼지의 크기와 농도, 노출기간, 작업강도, 노동자 나이, 호흡방법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관여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는 비교적 단기간에도 진폐증이 발생하는가 하면 반대로 장기간 먼지에 노출되더라도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음영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직검사에서는 분명한 진폐병변을 보이더라도 흉부엑스선사진에는 이상소견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흉부엑스선사진 소견은 진폐증환자에 대한 요양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진폐증환자 요양여부는 ‘업무상 발생한 진폐증 때문에 의학적으로 요양이 필요한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똑같은 진폐증인데도 단지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음영 농도가 특정한 수준 이하라는 이유만으로 ‘법’은 진폐의증을 다른 진폐증과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근로복지공단은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병형이 제1형 이상인 환자에게 합병증이 발생한 경우라야만 의학적으로 요양이 필요한지를 심사하여 요양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진폐음영의 농도가 그보다 낮은 경우에는 아무리 요양이 필요한 합병증이 발생하더라도 요양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 진폐의증환자는 전염병인 폐결핵이 합병되어야만 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차별은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의학’ 무시하는 법의 기준
국제노동기구 분류법은 진폐증에 대한 역학적 연구를 하기 위해 흉부방사선학적 이상소견을 간단한 부호로 분류한 것이지 진폐증에 대한 보상기준을 정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르면 동일한 흉부엑스선사진을 판독하더라도 판독자에 따라 그 결과에 차이가 난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뛰어난 판독자라도 동일한 사진에 대해 시차를 두고 반복하여 판독하면 그 결과가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의학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진폐증과 진폐의증이라는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진폐증환자의 법적 보상에 관련된 판정은 흉부엑스선사진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판정해야 한다. 그리고 진폐증 환자에 대한 궁극적인 요양여부는 흉부엑스선사진상 진폐병형이 아닌 ‘의학적으로 요양이 필요한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문의: 법률사무소 의연(02-598-4600)
2007년10월25일 ⓒ민중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