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증 발견 축하” 진폐환자 ‘슬픈 아이러니’

홍세화 기자 이규호 기자

월 150~200만원 산재급여 폐결핵 등 앓거나 입원해야 수급
‘재가환자’는 생계비 0원…노동부도 ‘형평성 어긋난다’ 인정

강원도 폐광지역으로 향하는 길, 가을 하늘은 하염없이 푸르렀고 둘러친 산은 제 철을 만난 듯 갖가지 색깔로 단장해 무척 고왔다. 태백시에 들어서자,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노란 꽃잎들을 마구 흩뿌렸다. 갑자기 짙은 슬픔이 밀려왔다. 우리는 이 강산에 살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강산은 아름다운데 거기 사는 우리는 추하다.

어느 신부님의 말처럼 정치가 고귀한 것은 그 본령이 사회적 연대의 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을 제도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정치에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정치는 부패, 비리, 무능의 온상일 뿐이다. 그래서 혐오를 부른다. 정치 혐오는 정치 무관심을 부르고, 정치 무관심은 다시 혐오스런 정치를 온존시키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 된다.

케이티엑스(KTX)·새마을호 승무원들, 이랜드 노동자들, 장애인들, 대학강사들…그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는다. 워낙 정치동물이 아닌 경제동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조차도 무력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관심의 불편함’에서 ‘무관심의 편함’ 쪽을 택한다. 마침내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를 억지 부리고 떼쓰는 것으로 돌리며 연대의 눈길을 스스로 거둔다. 일인시위, 단식농성을 아무리 벌여도 반응이 없는 사회, 사회적 약자들에게 남는 것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절규다. 간절한 호소는 치열한 투쟁의 양상으로 나아가고, 사회구성원들은 더욱 편한 마음으로 이를 비난한다.

7일 한낮.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태백의 ‘황지 연못’ 공원. 한국진폐재해자협회 이름의 펼침막엔 “정부는 ‘폭동’을 원하는가?”, “우리를 더 이상 막다른 길로 내몰지 말라”고 써 있었다. 오후 2시께 60~70대 노인이 대부분인 회원들과 시민 1천여명이 모여 들었고 ‘재가 진폐환자 생존권 확보 총궐기대회’가 시작됐다. “진폐환자 기만하는 노동부를 규탄한다”, “사생결단 투쟁으로 생존권을 확보하자.” 과거의 산업전사들은 오늘 연탄재보다도 못한 산업폐기물의 처지가 됐다고 자조한다. 진폐를 증거하듯 구호 소리는 그렁댔다. 시낭송에 이어 성희직 후원회장이 “사생결단, 진폐환자들에 희망을!”, “막장 정신, 죽음도 두렵지 않다”라고 혈서를 썼다.

그들은 오후 3시께부터 거리 행진에 나서 갱목시위, 연탄시위, 막장 모습 재현 등을 연출했다. 이후 노동부 서울지방노동청 태백지청에 들어가려는 과정에서 타이어를 불태우고 삽과 곡괭이로 담장을 헐려고 하는 등 잠시 격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합병증 축하” 진폐환자 ‘슬픈 아이러니’

진폐증은 고칠 수 없다. 고칠 수 없기에 입원요양 대상이 아니다. 폐결핵, 폐기종, 기관지 확장증 등 아홉 가지 중 하나를 합병증으로 앓아야 입원요양혜택을 받는다. 모두 3만여명(노동부 인정 1만7천여명)으로 추산되는 진폐환자 중 입원요양 환자는 3천여명이고 나머지는 재가진폐환자라고 부른다. 입원요양환자는 치료받으면서 월 150만~200만원 정도의 산재보험 급여를 받지만 재가환자는 생계비 지원조차 한 푼 없다. ‘100’ 아니면 ‘0’이다. 합병증이 발견돼 입원하는 동료를 ‘축하’하고 입원환자들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이런 문제들을 노동부도 알고 있다. 2001년 9월 노동부는 진폐환자 종합대책 6가지를 발표했다. 진폐합병증 인정 범위 확대, 진폐장해등급 확대, 보험급여 기준 및 요양 관행의 합리적 개선, 진폐 요양기관 및 복지 시설 확충, 진폐환자의 재활 프로그램 개발 운영, 진폐환자의 생활 보호대책 등이다. 오늘 진폐환자들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특히 입원환자와 재가환자 사이에 보험 급여의 형평성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노동부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그런데 대책만 발표했을 뿐 후속 조처가 없었다. 참여정부 아래서도 정권은 있되 정치는 없었다.

태백에서 20㎞ 떨어진 고한. 지난달 24일부터 단식농성 천막이 자리 잡은 곳은 강원랜드 입구다. 지난 7일에는 계속 단식중인 성희직씨 외에 김의상(78), 최승열(77), 김진한(68)씨가 릴레이 단식을 벌이고 있었다. 강원랜드는 본디 폐광 대체산업 육성과 지역주민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수천억원 규모의 순익은 매년 늘지만 주민 복지비용은 2006년 160억원에서 2007년 130억원으로 줄였다. 진폐환자 복지 기여금은 1억원도 안 된다. 태백지청 앞에서 집회 참석자들이 “ (단식농성 한달 째를 맞는) 오는 22일 강원랜드를 점거하는 등 사생결단의 각오로 투쟁하겠다”고 밝히게 된 배경이다. 과연 ‘제2의 사북사태’를 으름장으로만 받아들일 것인가.

진폐환자들의 생존권 확보 투쟁에서 성희직씨의 역할과 헌신은 특기할 만하다. 광부 시인이며 강원도의원 출신인 그는 사회정의의 개념조차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더욱 외로워진 의로운 투사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