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전은 안전? 가서 보니 끔찍했다
[현지 르포] 일 후쿠시마 핵사고 현장을 가다… 모든 핵발전은 범죄

11.04.27 이상홍

[후쿠시마 핵사고 현장 공동취재]
최예용(환경보건시민센터) 스즈키 아키라(노동건강연대) 이상홍(경주환경운동연합)

▲ 사고원전에서 60km 이상 떨어져 있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의 외곽에 있는 설산과 마을전경.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입국 수속을 밟는 승객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대부분 마스크를 했으나 도쿄의 하늘은 맑았고 황사는 없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황사 조사를 위해 중국에 출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출장 목적지를 아는 지인들은 “네가 왜 그곳까지 가야 하느냐?”며 걱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랬다. 어느덧 일본은 우리에게 금기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후쿠시마 조사는 주민들의 피해 상황과 일본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고 현실적인 방사능 방재 매뉴얼 및 교훈을 찾기 위해서 기획됐다. 한국과 일본에서 6명이 참여했고 환경재단이 후원했다. (*별도의 표기가 없는 방사능 수치는 ‘시간 당 마이크로시버트(uSv/h)’ 즉 1=1uSv/h이며, 거리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의 직선거리를 나타냄)

[하네다 공항 → 이와키시 의회] 방사선량 0.24 → 0.66

하네다 공항에서 이와키시로 출발하면서 주차장의 방사선량을 측정하니 0.24였다. 이는 평상시 방사선량(0.05)의 4.8배에 해당한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무거운 발걸음과 마스크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고 원전에서 남쪽으로 43km 떨어진 이와키시 의회에서 사토 시의원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쓰나미 피해 후손임을 강조했다. 에도시대(200년 전)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왔으며 그때 여러 마을이 수장되고 조상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4년 전부터 지진 대비를 위해 방재구역을 10km에서 30km로 확대할 것과 원자로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최악의 원전사고 앞에서 이와키시는 속수무책이다. 그는 주민들에게 “100km 밖으로 도망가라! 최소 30km 이상 도망가라!”고 말한다. 현재 약 34만 명 중 1/3이 완전히 피난을 떠났다. 그는 방사선량이 평상시의 10배에 달한다며 어린이와 임산부 등을 빨리 피난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와키시는 강제피난구역(20km) 바깥에 위치하고 있어서 정부의 별다른 조치가 없다. 조사단이 의회 주차장의 방사능을 측정했더니 0.66이다. 평상시의 9배다.

▲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의회에서 만난 사토 카즈요시 의원, 한일 조사단 일행에게 주민들이 피난을 떠난 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 최예용 후쿠시마

조사단은 후쿠시마시 북쪽에 있는 온천장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에서 이시마루(68)씨를 만났다. 이시마루씨는 제1원전에서 5km 떨어진 도미오까마치에 살면서 반핵운동을 해왔고 아키타에서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의 얘기를 들었다.

사고 당시 원전 안에 있던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지진이 발생하고 순간적으로 ‘따르르르’ ‘따르르르’ 소리를 계속 내면서 핸드폰 진동처럼 발전소가 떨렸다고 한다. 약 3분간 떨림이 계속됐고 발전소에 금이 가고 안개가 낀 것처럼 되었다고. 원전은 단기진동에 매우 취약하다고 했다. 아마도 쓰나미가 오기 전에 원전은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듯하다. 그의 집도 핸드폰 진동 같은 떨림이 강하게 왔고 지붕의 기와는 모두 떨어졌지만 마을에 무너진 집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증언은 조사단이 방사능 피해지역을 둘러보며 목격한 지진 상황과도 대동소이했다.
지진이 나고 원전 반경 3km 내에 피난지시 방송이 나왔다. 그가 살고 있는 도미오카(5km)는 3월 11일 오후 9시에 실내대피명령이 떨어져서 긴급시 피난 장소로 지정되어 있는 공공시설인 온천시설로 긴급대피를 갔다. 많은 주민들이 방사선 피폭을 차단할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을 찾아 동네 온천시설로 대피했다. 다음날(3월 12일) 오전 10시에 20km 내 피난지시가 떨어지고 온천시설에 버스가 와서 주민들을 20km 밖의 가와우치무라로 이동시켰다.

가와우치무라는 인구 3000명의 농촌으로, 피난민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온천 등에서 생활했다. 가와우치무라는 20~30km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강제피난구역 밖에 있었다. 그러나 지자체장이 주민과 피난민들을 다시 고리야마로 피난시켰다고 한다. 이는 정부의 방침이 아니라 현명한 지자체장의 용단으로 이뤄졌다.

피난 온 노인 중에 4명이 스트레스로 사망

▲ 4월 16일 후쿠시마시 피난소, 1700여 명의 원전 피난민이 생활하고 있다.
▲ 4월 14일 고리야마시의 피난소 아이들, 2000여 명의 원전 피난민이 생활하고 있다.

조사단은 지난 14일과 16일 고리야마시 시민체육관(2000명), 후쿠야마시 아즈마종합운동장(1700명)을 방문하여 좀 더 구체적인 얘기들을 들었다. 토미오카에서 피난 온 시라도 쇼우이찌(62)씨는 “주민들은 내일 다시 돌아 갈 줄 알고 간단히 나왔다”면서 “30~40년 동안 원자력은 안전하다고 설명해 왔는데 다 거짓말이었다”며 분노했다.

60대 아주머니는 피난 온 노인 중에 4명이 스트레스로 사망했다고 귀띔하며 “사람들이 ‘간바레 후쿠시마’라고 하는데 어떻게 힘을 내나?”라며 체념하듯 말했다. ‘간바레’는 힘내라는 뜻이다. 조사단이 만나본 피난민들의 공통된 불만은 이러했다.

그동안 방재훈련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고 훈련을 경험하지 못한 주민들이 많다. 관제방송은 자세한 정보제공 없이 즉시 피난 떠날 것을 강조했다. 주민들은 다급한 마음에 하루 이틀 피난을 떠나면 되는 줄 알고 아무런 채비 없이 길을 나섰는데 고향땅은 다시는 밟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금단의 땅 20km 이내 지역] 평상시 방사선량 500배 넘는 수치 표시

15일, 조사단은 금단의 땅인 20km 이내로 들어갔다. 본래는 14일 5km 지점인 토미오카를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20km 지점에서 도쿄 경찰의 제지로 포기해야만 했다. 15일은 미나미소마시 시장을 면담하러 가던 중 우연히 검문이 없는 도로를 발견하게 되어 후쿠시마 원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큰 두려움 없이 들어갔으나 이다떼무라 지역을 통과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방사능 계측기가 평상시 방사선량(0.05)의 500배를 넘는 수치를 표시했다. 피폭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측정치는 다음과 같다.

▲ 4월15일 원전 부근 지역 방사선량
ⓒ 이상홍 후쿠시마

▲ 원전에서 20km 떨어진 나미에마치의 지표 방사선량

특히, 21km 지점의 나미에마치 토양에서 99.89, 1km 지점인 제1원전 펜스에서 대기 중 방사선량이 94.75를 기록했다. 이는 평상시 방사선량의 1895배이며, 연간 피폭선량 한계인 1mSv를 시간 단위로 환산한 0.11과 비교해도 861배를 초과하는 방사선량이었다. 사실 제1원전 펜스부근의 방사선량은 차량 내 계측으로 진행하려고 했다. 계속 상승하는 방사선량을 체크해 온 조사단은 쉽게 차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선량 측정을 담당해 온 일본의 이베 선생이 갑자기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펜스로 다가갔다. 시간당 0.1밀리시버트는 그렇게 확보한 수치다. 아마 좀 더 머물렀다면 훨씬 고농도의 방사능이 계측되었을 것이다.

20km가 강제피난구역이지만 30km 지점부터 사실상 거주 주민을 찾을 수 없었다. 간간이 도로를 달리는 차들만 있을 뿐이었다. 도로를 따라 작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고, 십여 개의 마을을 연결하는 중간 중간에 인구 수백 명 안팎이 큰 마을들이 있었으나 모두 빈집이었다. 화단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고 집주변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나 창문 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주인 잃은 애완견만이 조사단을 반겼다.

6명의 일행이 함께 다녀서 다행이지 홀로 적막한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면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했을 것이다. 오전 10시 30km 지점을 통과하고 오후 1시 1.5km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앞에는 줄줄이 유령마을만 있었다.

▲ 4월 15일 원전이 있는 후타바마치 시가지,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고 도로위에 “원자력은 밝은 미래의 에너지”라고 쓰인 원전홍보선전물이 보인다.

▲ 4월 15일 동경전력이 지역에 기증하기 위해 건설 중인 실내체육관, 3월 28일 준공을 눈 앞에 두고 영원히 사용할 수 없는 건물이 되었다.

1994년 체르노빌 현지 탐사경험이 있는 최예용 소장은 앞으로 몇십 년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될 것이며 지금은 집들과 도로가 깨끗하지만 머지않아 마을은 잡초로 뒤덮이고 집들은 먼지와 비로 까만 얼룩이 지고 진짜 유령도시로 변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일주일간 다니면서 측정한 방사선량에 비추어본다면 대략 30km 이내 지역은 정주하기 힘들며, 60km의 후쿠야마시, 80km의 고리야마시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정부는 피폭허용한계를 1밀리시버트에서 20밀리시버트로 올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1밀리시버트를 지켜야 합니다. 정부가 원자로 통제에 실패하니까 국민들을 통제하려고 합니다”라는 사토 시의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한국 원전은 안전하다” 되풀이 하는 정부, 현장에 와봐라

▲ 4월 16일 후쿠시마시 화견산(花見山), 시민들을 유혹하는 화견산의 방사능을 처음 계측할 때(사진) 0.336uSv/hr을 가르켰으나 이후 최고 3.66uSv/hr로 검측되었다.

▲ 4월 16일 후쿠시마시 화견산, 많은 시민들이 마스크를 했으나 높은 방사능 오염에도 보호장구가 없는 가족도 있었다.

현대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일본에서 어떻게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사고,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도 당시 최고의 강대국에서 일어난 사고다. 지진활동이 가장 활발한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 보유국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해답이 아닐까? 오만이 무지보다 무서운 법이다.

조사단은 쓰나미 피해지역도 조사했다. 쓰나미는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수백수천의 가옥들이 있어야 할 끝없는 대지들이 진흙, 모레, 쓰레기더미로 덮여 버렸다. 고압송전 철탑들이 쓰러져 고철로 변했다. 자동차는 휴지처럼 찢어지고 수천 톤의 선박이 뒤집혀 땅위에 올라와 있었다. 용케 쓰나미를 피해 살아남은 주민은 흔적만 남은 집터에서 넋을 빼앗긴 채 있었다. 이런 쓰나미를 향해 우리 정부는 “한국 원전은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현장에 오라! 그리고 똑똑히 보라! 과연 안전하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원전도 자연재해의 힘 앞에 안전하지 않다.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자연재해를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다면, 핵발전소 건설은 그 자체로 범죄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13일~18일까지 후쿠시마 원전사고 현장을 조사하고 작성한 기사입니다

출처 : 한국 원전은 안전? 가서 보니 끔찍했다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