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임단협의 뜨거운 감자 ‘근골격계’
재계, 노동계 반발에 “다 들어주면 망한다”… 규개위 결정 주시
박수원 기자
“목도 아프고, 허리도 뻣뻣해져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앉았나 섰다는 반복해야할 처지다. 침대에 매트를 깔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전남 영암에 위치한 삼호중공업에 근무하는 박현수(46)씨. 그는 89년에 삼호중공업에 입사해 배 만드는 일을 13년 동안 해 왔다. 13년간 일하고 그가 얻은 질병은 목 디스크와 허리디스크.
▲ 10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민주노총 삼호중공업 노조원이 ‘안전보건제도 규제 완화 반대’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03 오마이뉴스 박수원
박씨는 차를 타고 다닐 때도 허리가 불편해 허리 뒤에 뭔가를 괴고 앉아야 한다. 작년 11월부터 노조 집행부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올해 120명 제출한 집단 산재 신청에서도 빠졌다.
그는 9일부터 광화문 역 앞에서 ‘근골격계 대책 마련 촉구’ 릴레이 노숙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10일 노숙 현장에서 박씨를 잠시 만나 얘기를 나눠보았다.
– 작업장에 근골격계 질환이 어느 정도인가.
“삼호중공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포함해서 모두 6000명이다. 회사는 무조건 벌금으로 때우려고 하는데,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산재 은폐와 관련해 회사가 고발된 사건만 60건이다. 제대로 진단 받으면 아마 직원 가운데 50%가 산재요양 판정을 받게 될 거다. 조선업종이 경기가 좋아 이미 2년 물량이 확보돼 있지만, 직원들을 충원하지 않으니 노동강도가 세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모두 산재 신청하면 누가 일하나. 기업 입장에서는 손해가 많다고 볼 수도 있을텐데.
“직원들 가운데 디스크 증세가 대부분인데, 요추염좌 증세가 있을 때 치료를 받으면 병을 키우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방치한다. 사전에 예방하면 산재인정 받는 것 보다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 재계에서는 조선업종은 근골격계 질환 판정에서 제외해 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근골격계 질환자들 대부분이 조선업에서 생기고 있는데 이 업종을 제외하라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뜨거운 감자’ 근골격계
근육과 뼈, 신경 등에 부담을 주는 단순작업을 오래 되풀이하거나 불편한 자세로 장시간 일할 때, 어깨 허리 목 등 관절 부위가 결리거나 마비되는 증상이 바로 근골격계 질환. 이 근골격계 질환이 올해 임단협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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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노동자 수는 1997년 221명에서 2002년에는 1827명으로 갑자기 9배 가량 늘어났다. 특히 지난 한 해 동안만 현대중공업 253명, 대우조선 158명, 현대자동차 78명, 기아자동차 46명 등 자동차와 조선 업종에서 근골격계 질환이 집단적으로 나타나면서 이 문제가 노동계의 주요 현안으로 부각됐다.
지난 4월 18일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현장조직 소속 노조원들이 근골격계 질환의 직업병 인정과 산업재해 승인을 요구하며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근로복지공단 점거를 일부에서는 노조 선거를 앞둔 선명성 대결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근골격계가 중요한 현안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올해 위원장 선거를 실시한 기아차노조 역시 근골격계 질환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각 후보들의 주요한 공약 사항이었다.
이렇다 보니 자동차업종이나 조선업종에서 근골격계 질환 처리는 회사에게나, 노조에게나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대자동차와 중공업, 기아차, 대우조선 등 금속관련 사업장에서는 근골격계 질환 문제가 임단협의 핵심 쟁점사항이다.
2002년 12월 말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면서 근골격계 직업병 예방에 대한 사업주 의무가 신설돼 올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예방 대상 사업장은 △최소 3년에 한번 근로자 면담이나 근골격계 질환 증상 설문조사 등 ‘유해요인 조사’ △통증 등의 관련 증상을 호소하는 근로자에게는 의학관리나 작업전환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 가운데 핵심은 예방적 차원의 ‘유해요인 조사’. 이는 근골격계 질환의 위험 요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물론 경영계에서는 이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근골격계 질환이 제조업은 물론 사무·서비스 직종 등 거의 모든 산업에 적용할 경우 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노동계에서 요구하는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기업은) 망하라는 소리밖에 안된다”면서 “근골격계 질환과 직업적 요인과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데 집단적으로 산재 신청을 하면 기업 하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근골격계가 노동계 주요 이슈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해 올 4월 조직개편을 단행하면서 산업안전팀을 구성해 대비책을 마련했다.
근골격계 관련 경총 요구사항은 업종별, 규모별 단계적 실시로 요약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건설업, 조선업, 50인 미만 사업장 을 제외하고 법을 실시하되 그것도 유예기간을 두자는 것.
경총 산업안전팀 관계자는 “근골격계 질환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맞는 개선대책이 정확하게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사후 관리가 힘들다”며 “건설이나 조선업종은 작업대가 고정적이지 않아 근골격계 질환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근골격계 질환이 최근 4년 사이 961%가 증가한 것에서도 보여지듯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이해관계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건강한 노동세상’ 조성애 사무국장은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규제로 풀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라면서 “98년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해 제반 법률이 사라지면서 산재와 직업병이 증가한 점, 특히 근골격계 질환이 급증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규제개혁위원회가 18일 회의를 통해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개정안’을 완화시키려는 재계와 이를 막으려는 노동계 가운데 누구 손을 들어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노동부 공청회 무산시킨 이유
근골격계를 놓고 이해당사자들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6월 3일 노동부가 준비한 공청회 무산이다.
노동부는 이해관계자들과 이날 산업안전공단에서 공청회를 통해 7월 1일부터 시행되는 법안의 고시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민주노총의 불법 점거 사건이 공청회 무산의 원인이었다.
노동부와 대화 파트너인 민주노총은 왜 로비 점거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을까? 민주노총은 노동부가 ‘근골격계 부담작업’으로 제안한 기준이 전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노동부가 제시한 근골격계 부담작업에는 △목을 30도 이상 앞으로 구부리거나 뒤로 젖힌 자세, 혹은 허리를 45도 이상 앞으로 구부리거나 뒤로 20도 이상 젖힌 자세로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수행하는 작업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4.5 kg (10 파운드) 이상의 물건을 한손으로 잡는 경우 등이 포함돼 있다. 이 밖에도 노동부는 ‘근골격계부담작업 정의’를 워싱턴주의 근골격계 관련법안을 거의 유사하게 가져왔다.
민주노총은 “노동부의 제시한 기준대로라면 근골격계 질환을 인정받는 사람은 1%도 되지 않는다”며 “현실성이 없는 고시안인데다 워싱턴주 법안을 그대로 번역한 내용을 보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노동부 산업보건환경과 실무자는 “최대한 양쪽 의견을 반영해 7월 1일까지 고시안을 만들어야겠지만, 양쪽 입장 차가 커서 어려움이 많다”고 설명했다. / 박수원 기자
2003/06/11 오전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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