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우량 종합 석유화학회사’
꿈 아래 죽어가는 건설노동자
매일노동뉴스 조현미 기자 08-04-30
롯데대산유화 신축현장에서 5개월 새 3명 사망, 8명 중상
충남 대산석유화학단지에 있는 롯데대산유화 신축ㆍ보수 공사현장에서 대규모 산업재해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이달까지 세 명의 건설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지난해 1월 안전망 붕괴로 추락한 정아무개씨를 비롯해 8명이나 중대재해를 당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건설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배경에는 석유화학분야에서 덩치 키우기에 골몰하고 있는 롯데그룹의 무리한 공사기간 단축이 원인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4일 롯데대산유화 삼성엔지니어링 PP현장에서 배관 용접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필름을 촬영하던 윤아무개(37)씨가 쓰러져 천안 단국대병원으로 이송됐다. 29일 건설산업연맹 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지부장 홍기환)에 따르면 사고 당시 현장사무소는 “빈혈로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곧바로 퇴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윤씨는 뇌출혈로 뇌사상태였으며 지난 10일 숨을 거둔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현장에서 재해 잇따라
윤씨가 사고를 당한 현장에서는 바로 전날에도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3일 H빔 철골 부착작업을 하던 최아무개씨는 호이스트카(건설현장에서 임시로 설치하는 엘리베이터)에 끼이는 압착사고를 당했다. 최씨가 몸에 건 안전고리가 호이스트카에 말려 몸까지 말려들어간 것으로 노조는 추정했다. 최씨는 서울로 이송 중 과다출혈로 숨졌다.
이밖에도 지난 1월 같은 현장에서 정아무개씨가 안전망 붕괴로 추락, 두개골과 전신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지난 19일까지 네 번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이후 심한 장애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지난해 12월부터 롯데대산유화 공사현장에서 추락으로 사망하거나 중대재해를 입은 노동자만 4명에 달한다.
안전관리소홀로 사고 재발
손기범 충남지부 사무국장은 “정씨의 경우 안전망만 제대로 설치돼 있었더라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전관리 소홀로 인해 계속 비슷한 산재사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일 호이스트카에 말려 압착 사망사고를 당한 최아무개씨의 경우 원래 2인1조가 한 팀이 돼 한 사람이 안전감독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최씨는 혼자 작업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조가 회사측과 단체협약을 맺고 있는 울산과 여수의 플랜트 건설현장에서는 ‘책임시공’이 이뤄지고 있다. 안전망 설치작업을 하면 누가 했는지, 실명을 밝힘으로써 책임 여부를 확실하게 가리는 것이다.
유해물질 모른 채 작업하는 노동자들
석유화학공장을 신축하거나 보수할 때는 무엇보다 유해물질 관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롯데대산유화 단지에서 최근 5개월 새 발생한 가스질식사고와 폭발사고만 4건에 달한다.
건설노동자들은 자신이 시공하는 배관에 어떤 물질이 사용되는지조차 모른 채 절단ㆍ교체작업을 하고 있어 대규모 폭발사고까지 우려되는 실정이다.
지난 14일에는 박아무개씨가 파이프 절단작업을 하다가 파이프 안에 남아 있던 가스 폭발로 인해 얼굴과 팔 등에 화상을 입었다.
19일에는 노동자 3명이 탱크 안에 남아 있는 잔류가스를 마시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노조는 “현장에 어떤 유해가스가 남아 있는지 노동자들이 전혀 모른 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며 “롯데측의 무리한 공기단축 요구로 시공사들이 노동자들의 안전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에 따르면 롯데대산유화 단지처럼 새로 증설한 라인을 기존 배관과 연결할 때 잔류가스가 완전히 제거돼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사현장에는 취급유해물질에 대한 기본적인 표시조차 없다. 그야말로 건설노동자들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노조가 회사측과 단체협약을 맺고 있는 여수나 울산플랜트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욱 심각하다. 김행곤 여수건설노조 노동안전국장은 “여수의 플랜트 공장에는 배관 속에 어떤 유해물질이 흐르고 있는지를 표시해 노동자들이 위험 여부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기단축 ‘급급’, 노동자 생명 ‘뒷전’
롯데대산유화 현장에서 산재가 잇따르고 있는 이유에 대해 노조 관계자들은 “발주처인 롯데그룹이 무리하게 공사기간 단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석유화학공장 건설현장의 경우 공장가동이 완전 중단된 상태(셧다운)에서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충분한 공사기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롯데측은 연간 5천명에 달하는 인력을 투입해 하루 15시간 가까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손기범 지부 사무국장은 “롯데 공사현장에서 건설노동자들은 대개 15일 동안 15시간 이상 계속 일을 하고 있다”며 “노동자들이 체력에 한계를 느끼는 상황이기 때문에 산재발생 확률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잇단 산재사망사고로 공사중지명령까지 받은 하이닉스반도체 청주공장 증설공사현장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공사를 수주한 현대건설은 18개월 이상 소요되는 공사기간을 9개월로 줄이기 위해 ‘A-Project’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사기법을 도입했다. 연인원 50만명을 투입, 하루 4천여명 이상이 휴일없이 24시간 맞교대로 공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해 3건의 산재사고로 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업계호황 편승할 생각만 하는 롯데그룹
롯데그룹의 무리한 공기단축은 최근 석유화학 산업의 호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03년 롯데대산유화의 전신인 현대석유화학 2공장을 인수한 롯데는 올해 국내 단일기업으로는 최고의 나프타 생산공정(NCC) 설비를 확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롯데그룹이 올해 초 호남석유화학ㆍ케이피케미칼과 함께 롯데그룹 유화 3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롯데대산유화를 ‘신성장동력’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다. 세계적 종합 석유화학회사로 도약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롯데그룹이 대산유화단지 공사를 서두르는 이유는 최근 석유화학업계가 고유가 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산업용원료로 사용되는 나프타 소비는 세계경제의 전반적 성장에 따라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만 수요가 7.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석유화학산업의 호황에 편승하려는 롯데그룹의 야욕이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