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 “평등해야 건강하다” 최종 보고서 발간
[기고] “평등, 민주주의, 다른 정치가 필요하다”
2008-08-28 오후 5:10:06
28일 오후 5시 세계보건기구(WHO)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Commission on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가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위원회는 “사고, 빌병 외에도 불평등과 같은 사회 요인이 건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앞으로 전 세계 보건의료 정책에 큰 영향을 줄 전망이다.
은 이 보고서 작성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정혜주 토론토대 연구원, 조안 베낙 스페인 폼페우 파브라대 교수, 카를레스 문타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의 공동 기고를 싣는다. 이들은 이번 위원회 내의 ‘고용관계 지식네트워크’에서 3년간 연구를 해왔다. 이들은 이 기고에서 보고서의 주요 내용, 정책 파장 등을 꼼꼼히 설명하면서 관심을 촉구한다.
2008년 8월 28일 런던 시간으로 오전 9시(한국 시각 28일 오후 5시), WHO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에서 최종 보고서를 발간했다. 고(故)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의 의지로 시작되었던 이 위원회가 수많은 초고, 수정, 회의와 논의 끝에 만 3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번 위원회의 성과는 우리가 숨 쉬고 생활하는 사회 그 자체-따라서, 사회적 결정 요인–가 우리 모두의 건강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의 건강은 건강 정책이나 의료 서비스의 개혁만으로는 크게 개선되기 힘들고, 국민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보건 정책을 넘어선 사회 전반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이 보고서는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건강에 대한 사회적 결정 요인은 계급, 성별, 인종, 지역과 직능 등을 횡단하여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고, 불균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건강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불평등한 현재의 사회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건강의 불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원회의 약사(略史)를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위원회는 2004년 5월에 열렸던 제57회 세계건강회의(World Health Assembly)에서, 고 이종욱 당시 WHO 사무총장에 의해 설립이 선포되었다. 위원장은 영국의 역학(疫學)자인 마이클 마못이 맡았고, 위원으로는 노벨상 수상자인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과 이탈리아 출신의 EU 의원인 지오바니 베르링구엘(Giovanni Berlinguer), 칠레 전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Ricardo Lagos) 등의 정책가 및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주요 연구 과정은 지식네트워크(Knowledge Network : KN)라고 불리는 9개의 연구 집단에서 진행하였다. 각각의 KN에는 10명 내외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고용 관계, 아동 발달, 지구화, 보건 제도, 도시 정책, 여성 및 양성 평등, 그리고 사회적 배제의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각각의 주제 영역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 검토하고, 이 과정에서 밝혀진 내용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정책적 권고안을 내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원들은 이 권고안들을 검토하여 최종보고서에 반영하였다.
위원회 보고서는 건강의 ‘불평등’이 왜 현재 지구상에서 주요한 질병의 하나인지 수많은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매년 지구상에서 죽어가는 5000만 명의 인구 중 40%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조기 사망하는데 이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레소토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일본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에 비해 42년 정도 일찍 죽는다. 아프리카인은 스웨덴인에 비해 15세에서 60세 사이에 사망할 확률이 10배 가량 높다.
잘 사는 나라라고 해서 불평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그라스고 안에서도 제일 부유한 지역 주민이 가장 빈곤한 지역 주민들에 비해 28년이나 더 오래 산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남성은 같은 나라의 일반 남성보다 17년 일찍 죽는다. 미국 흑인 남성의 평균 수명은 방글라데시 남성보다 짧고, 미국 흑인과 백인의 평균 수명이 같았다면 1991년에서 2000년 사이 10년 간 거의 90만 명의 흑인이 죽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스페인의 경제 수준이 가장 낮은 지방에서는 시간 당 4명이 건강 불평등으로 사망한다. 지역 뿐 아니라 직업도 건강 불평등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산업 재해로 사망할 확률이 두 세 배 정도 높다.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근로자들은 이들을 고용하는 여성에 비해서 건강 상태가 더 나쁠 확률이 3배 정도 높다.
우리는 불평등 때문에 고통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많은 과학적 연구 결과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불평등이 더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단지 빈민이나 사회적 소수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영국의 가장 빈곤한 층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각한 미국의 가장 부유한 층보다도 오히려 건강상태가 더 좋다. 물론 사회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건강과 삶의 질이 점점 더 열악해지고 건강이 나쁘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사망에 이를 확률은 증가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위원회 보고서에서는 그 원인이 생물학적, 유전적이거나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때문이 아님을, 심지어는 보건의료 체계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 나라의 경제 수준도 그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전적 인자는 사회적 인자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발현되기 때문에 유전적 인자 자체가 주요 원인일 수 없다.
개인의 건강 행태는 개인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인구의 75%(약 45억 명)는 건강하게 식생활을 유지하거나 좋은 주거 환경에서 살거나 안전한 작업장에서 일할 선택의 자유가 없다. 건강 정책과 보건 서비스는 중요하지만, 건강을 결정하는 ‘근본’ 원인이 아니다. 보건 서비스는 다른 사회적 근본 요인의 영향으로 질병을 얻거나 불건강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일례로 미국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기대여명을 증가시키는 데에 의료서비스가 기여한 정도는 최대로 잡아야 20%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나라의 경제수준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 나라의 건강 불평등을 완화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악화시킬 수도 있다. 미국은 매우 부유한 나라이지만 기대여명(어떤 시점의 남아 있는 생존 기대 수명)도 상대적으로 짧고, 건강 불평등도 심각하다.
한편, 상대적으로 가난한 쿠바, 코스타리카, 스리랑카와 같은 나라들은, 특히 쿠바의 경우 미국 수준의 영아 사망률과 기대여명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 나라 모두 건강 불평등 수준도 낮다. 가파른 경제성장의 시기에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멕시코의 예도 잘 알려져 있다.
위원회의 입장은 명확하게도 이 모든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돈, 권력,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원회가 질병과 불평등의 ‘원인의 원인 (causes of causes)’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나 빈민, 여성, 실업자,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 등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불건강의 상황에 처해지며 개인적, 사회적, 산업, 혹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건강에 유해한 요인들에 노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인의 원인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이루는 이러한 근본적인 자원을 균등하게 재분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건강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문제 중 대부분은 오늘날의 기술적 및 재정적 수준에서 조절하거나 없앨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일국 내,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적 혹은 정치적 계획이 필요한 지에 대해 서술한다. 이러한 전략에는 고용 형태와 업무 환경, 그리고 거주 환경의 개선, 이주 노동자에 대한 좀 더 평등한 접근, 사회적 배제를 점차 완화해 나가는 것 등이 포함된다.
또 실업 감소,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사회적 배제의 완화, 교육의 평등한 기회 확장, 주거 및 근로 환경 개선과 같은 평등주의적(egalitarian) 사회 정책을 추진해나가기 위해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이 부분에 투자하는 재정의 개혁도 필요할 것이다. 소위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은 이러한 공적 사회적 투자가 있을 때에 향상되는 것이다.
사회적 정의는 매우 측정하기 힘든 가치이지만, 건강 불평등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그 한 척도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건강 불평등과 복지국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건강 불평등에 대한 공적인 토론은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며,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주요 정책 행위자인 정당이나 국제기구, 사회-시민 단체나 노동조합 등에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는 지금의 시기에 발간되는 이 보고서는 단지 불평등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서 이를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갖는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수준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우선순위가 크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보다는 감소를 지지하는 정치적 분위기와 정치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혜주/토론토대 연구원 외 2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