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면특별법 제정에 국민이 직접 나선다
국민서명운동 통해 국회 압박..양대노총도 적극 나서기로 다짐
조현미 기자 09-01-21
“석면 피해 환자들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요. 지금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지금 당장 주민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사망자 사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덕정마을에서 올라온 정지열(67)씨)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 시민들과 노동계가 한자리에 모였다. 정부에 석면피해자 구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정지열씨를 비롯한 석면 피해 주민들은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사는 국민을 구해달라”며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호소했다.
국회의 석면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양승조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81명은 지난 15일 석면피해보상법안을 발의했다. 석면피해 가족과 노동·시민단체가 지난해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Ban Asbestos Network Korea)를 구성한 데 이어 이날 한국석면피해자와 가족협회도 결성됐다. 이 날 가족협회 준비위원회와 노동계는 여의도에서 국민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늘어나는 석면 피해 사례
최근 충남 홍성군에서 지역 주민들이 석면 관련 질병을 집단으로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앞으로 피해 사례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석면피해 관련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대표적인 석면 질병인 악성중피종의 경우 진단을 받은 뒤 1년 내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악성중피종은 흉막·복막 등을 덮고 있는 중피조직에 생기는 종양으로 주된 발병 원인으로 석면이 지목되고 있다. 악성중피종은 석면에 노출된 지 15~40년 뒤 발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석면 피해자가 치료 기간 중에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시효·대상 사라져 소송으론 한계
석면 피해와 관련한 첫 소송은 부산에서 시작됐다. 제일화학 백석면부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고 원점순씨의 유족은 지난 2005년 제일화학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지난 2007년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고, 유족들에게 약 1억5천만원의 위로금이 지급됐다. 고 원점순씨는 퇴사한 지 무려 26년이 지난 2004년 7월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만에 숨졌다.
지난 95년 조선소 건축공사 현장에서 근무한 뒤 악성중피종이 발병한 건설노동자도 2006년 산재요양승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사업주가 요양승인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서울행정법원은 2007년 “건축현장에서 석면에 노출돼 악성중피종이 발병한 것”이라며 “업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민사·행정 소송만으로는 석면 피해자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석면특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 발제에 나선 변영철 변호사는 “현재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라며 “폐광된 광산의 경우 소송할 상대방이 없어 소송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망한 뒤 10년이 지났을 경우 소멸시효로 유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변영철 변호사는 “피해자가 늘 경우 해당 기업이 손해배상을 책임지는 데도 한계가 있다”며 “석면피해자에 대해 국가가 보상을 책임지는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일본, 국민여론으로 법 제정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빨리 석면 문제가 사회 문제로 거론돼 왔다. 일본에서는 지난 87년 노동·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석면추방전국연락회의가 결성됐다. 2005년 이른바 ‘구보타 쇼크’ 사건을 계기로 2006년부터 석면건강피해구제법이 시행되고 있다.
구보타 쇼크는 청석면을 함유한 수도관을 생산한 구보타에서 근무한 노동자뿐만 아니라 인근 공장 인근 주민에게 악성중피종이 집단 발병한 사건이다.
후루야 수기오 석면추방전국연락회의 사무총장은 “틈새없이 모든 석면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신속하게 보상을 실현하는 것이 석면건강피해보상제도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양대노총, 조직력 발휘할 때
일본의 석면관련법이 만들어진 주요 동력은 국민의 서명운동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5년 말 국민을 상대로 법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됐고, 불과 3개월 만에 118만명이 서명에 참가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가운데 110만명이 노조 조합원이었다.
일본에서 20년 동안 석면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는 석면추방연락회의 활동가 나카무라 다케시씨는 “석면 피해자의 대다수가 노동자였기 때문에 노조에서 적극적으로 서명에 참여했다”며 “유가족들이 사업주를 대상으로 개별교섭을 하다가 노조가 교섭을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 고베지방법원은 지난해 말 노조의 교섭권을 인정한 첫 판결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사례처럼 한국에서도 조직돼 있는 노동단체가 석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공동대표인 백헌기 한국노총 사무총장과 김지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석면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동계가 적극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김지희 부위원장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른 채 죽은 것처럼 억울한 것은 없다”며 “석면 문제에 주목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정부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백헌기 사무총장은 “노동자와 국민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한국노총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