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사고 지역인 후쿠시마 현1)을 방문했다. 그 곳에서 지자체 관계자, 반핵활동가, 피난소 피난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핵발전소 주변을 포함한 반경 80Km 지역의 방사선량을 측정했다.
핵발전소에서 북서방향 60Km 떨어진 후쿠시마 시 교외에서 방사선 측정량이 1.93μSv를 기록했다. 1년 누적량으로 환산하면 16.9mSv은 일반인 연간 피폭 제한선량의 17배에 해당한다. 매화나무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대조된다.
핵산업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한 결과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핵발전을 포함한 핵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해마다 전력회사에 5천억 엔 (6조원)이나 되는 예산을 지출해왔다. 핵발전은 안전하고 깨끗하며 싸다는 전력회사의 선전에 언론, 어용학자, 저명인사가 동원되었다. 일본의 핵발전소는 모두 바닷가에 건설되어 있다. 바닷물을 냉각수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보상금이 사용된다. 또한 핵발전소가 위치하는 지자체와 현에는 교부금이 주어진다. 일단 핵발전소 건설이 결정되면, 지역사회에 일자리가 생기고 건설 후에 전력회사는 지역 주민을 하청업무 등에 우선적으로 채용한다.
후쿠시마 시 아즈마 종합체육관에는 1,700명 정도가 피난해 있었다. 발전소에서 20Km 떨어진 가츠라오무라 지역에서 피난 온 60대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츠라오무라는 농촌 지역이며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주로 외지로 나간다. 이 남성은 철근공으로 60년대에 일본 최대 댐인 구로베 댐 공사 현장에서 일했고, 뒤이어 시작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건설 공사에 참여했다. 1호기부터 5호기까지 관여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남녀 모두 핵발전소 공사장에 나갔다고 했다. 남성은 후쿠시마 공사 후 도쿄에 일하러 나갔다가 도쿄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고향인 가츠라오무라로 돌아왔다. 장애가 있어 기초생활수급자 상태였다. 그는 병약자에게 우선적으로 주거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여성도 뇌출혈로 반신에 장애가 있는 분이었다. 아들이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는데 방사능 오염 소문 때문에 거래가 중단돼 회사는 문을 닫았고, 아들은 다른 지역의 관련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여성은 더 이상 원망의 말은 하지 않았다.
반핵활동가 이시마루 씨(68세)는 원래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남쪽에 위치하는 토미오카마치에 살고 있었다. 사고 후 손자를 데리고 300Km 떨어진 아키타 현에 피난해 있다가, 조사단을 안내하기 위해 후쿠시마로 온 것이다. 후쿠시마 제1, 제2 핵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을 후타바 지방이라고 하는데, 이시마루 씨는 ‘후타바 지방 원전반대동맹’에서 40년 간 활동해 왔고 지금은 대표를 맡고 있다.
이시마루 씨가 전력회사의 지배구조를 설명해 주었다. 피난소에서 리더 격으로 나서는 사람은 대개 도쿄전력 하청회사 등 핵발전소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 다루는 법을 아는 사람이 나서서, 피난소에서도 핵발전소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도쿄전력이 피난소를 찾아갔을 때도 그 리더 역할 하는 사람이 “오늘은 항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피난민들의 호소와 항의를 막으려고 했다.
핵발전소가 건설된 지역과 주변 지역에는 교부금이 지급된다. 그래서 핵발전소 가까이에 갈수록 도로도 넓어지고 문화/복지 시설물이 눈에 잘 뜨인다. 우리가 사고 발전소 5Km 권역에서 보았던 체육관은 3월 말 완공 예정으로 도쿄전력이 지어준 것이었다. 폐허가 된 마을 속에서 그 체육관은 마치 지진 피해가 없는 것처럼 서 있었다.
이이타테무라 지역의 시라우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측정한 공간선량이 7.87μSv, 지표에서 12.29μSv를 기록했다.
이시마루 씨가 우리를 피난지역인 반경 20Km 지점까지 차로 안내해 주었다. 그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반경 30Km를 넘는 지역이지만 국지적으로 방사선량이 높은 핫스팟 (hotspot)으로 마을 전체가 피난 지역으로 선정된 이이타테무라라는 마을이 있었다. 핵발전소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교부금 같은 것을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는 지역이다. 나름대로 농축산업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지며 마을 만들기를 실천해 왔던 평화로운 마을이 강제 이주 지역이 된 것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도쿄에서 쓰는 전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한 눈물이었다.
전력회사는 핵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돈으로 지역 주민들을 매수했고, 초기에는 경찰력을 동원해 반대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 언론과 전문가도 조직하면서 반대 의견은 아주 소수파로 전락해버렸다. 도쿄전력을 포함한 전력회사 노동조합인 전력총련은 일본 노총인 렌고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내에서도 영향력이 큰 조직이며, 렌고는 핵발전을 지지하고 있다. 전력총련 출신 지방의원과 국회의원들도 지역의회와 국회에서 핵발전 추진 역할을 맡아 왔다.
과거 40년 동안 이렇게 강력한 동맹이 형성되면서 핵발전 추진력은 갈수록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시마루 씨 말처럼 ‘원자력 제국주의’ 사회에서 돈과 어용학자, 매수된 언론에 의해 이성적인 대안 에너지 정책이나 탈핵사회 전망은 확산될 기회를 잃었다. 이렇게 주입된 ‘핵발전은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은 핵사고 직후도 큰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요미우리신문 2011.4.4 보도 (전국 조사, 4.1~4.3) |
마이니치신문 2011.4.18 보도 (전국 조사, 4.16~4.17) |
아사히신문 2011.4.18 보도 (전국 조사, 4.16~4.17) |
핵발전소 ?모두 폐지 12% ?삭감 29% ?증설 10% ?현상 유지 46% |
전력의 30%를 핵발전으로 조달하는 현재 에너지 정책 ?모두 폐지 13% ?삭감 41% ?부득이하다 40% |
핵발전소 ?중지 11% (7%) ?삭감 30% (21%) ?증설 5% (13%) ?현상 유지 51% (53%) *( )는 2007년 조사 결과 |
핵발전소를 폐지 내지 줄여야 한다는 사람들이 약 40% 정도 되지만, 현상 유지하자는 의견도 절반에 달한다. 아사히신문 보도에서는 2007년 조사결과와 비교할 수 있는데, 증설하자는 의견이 줄어들고 축소하는 의견이 늘어났다. 그러나 현상 유지라고 답한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4월 말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도 핵발전을 추진해 온 보수적인 인사가 당선되었다. 핵시설이 있는 지역에서도 핵발전소 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유지되고 있다.
반면 일본 전국에서 탈(脫) 핵발전을 요구하는 크고 작은 모임과 집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1980년대까지는 총평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 사회당의 정치 블록이 반핵 운동을 전개해 왔지만 총평 해산과 함께 힘을 잃었다. 지금 일어난 반핵 운동은 그 운동을 계속해온 사람들과 새롭게 탈핵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들과의 연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경험한 일본인들이 과연 탈핵 사회로의 변화를 선택할 수 있을지, 현재 일본 사회의 민주주의가 도마 위에 올라 있다.
핵발전소에서 남향 33Km 지점 국도변에 “원전 어딘가로 가져가” “원자력발전 필요 없다”라는 붓글씨가 쓰인 다다미가 걸려있다.
1) 현은 한국의 ‘도’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