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일하니 정말 죽네
일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가지 제언

강수돌 고려대학교 교수(조치원 신안 1리 이장)

지난 3월28일 충북 청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백아무개 교사(47)가 숨졌다. 그는 아침께 출근해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밤 11시쯤 귀가한 뒤, 갑자기 가슴통증과 두통을 호소하다 심근경색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 학교 교감은 “새 학교로 부임해서 3학년 담임을 맡은 백 교사는 한달 가까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율학습이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학생들을 끝까지 지켜주던 사람이다”며 “그런 열정이 오히려 화를 부른 것 같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한 달 동안 밤 11시까지 일한 교사의 죽음

한 대학에서는 연구와 강의에 열의를 보인 40대 교수 두 명이 지난 3월에 때 아닌 죽음을 맞이했다. 과로사에서는 공무원도 예외는 없다. 2006년 7월14일자 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과로로 세상을 떠난 공무원은 462명이다. 야근과 스트레스에 따른 뇌심혈관계 등 순환기 질환이 주요 원인이다. 연령별로는 40대가 41%, 50대가 42%다. 또 1년6개월 사이 한국타이어에서는 노동자 15명이 일과 관련해 줄지어 사망했다.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은 60% 이상이 주당 48시간 이상을 노동하며 휴일 노동 및 연장 근로, 몰아치기 근무(쉼 없이 과중한 노동을 하고 나중에 쉬자는 식으로 하는 벼락치기 노동)를 ‘밥 먹듯’ 한다. 근골격계질환이나 과로사가 쉽게 뒤따른다. 오죽했으면 노조가 나서서 ‘주당 64시간’(이것도 많지만)을 초과하는 노동을 못 하게 규제하려 들까. 비단 이런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현장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른바 IMF 시기에 사상 초유의 대량해고라는 사회경제적 폭력을 경험하는 가운데 심각한 충격과 상처를 받은 노동자들이 ‘언제 잘릴지 모르니 일할 수 있을 때 죽지 않을 만큼 일하자’는 다소 병적인 정서를 공유하게 된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98년 노동자의 30% 정도를 해고하려는 계획을 둘러싸고 노사간 전쟁을 치룬 현대자동차에서는 2002년 한해만 과로사 추정의 줄초상이 16~18건이나 나왔다. 설사 옆에 일하던 사람이 쓰러져 나가도 충격은 그때뿐이다. 깊은 고민이나 사회적 의제화가 잘 안 된다. 이게 우리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느긋함’ 뺏어가

조선시대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오늘날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비교해 보라 가끔 마당극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걸음걸이는 한마디로 느긋함, 그 자체였다. 상민이라고 해서 그다지 바쁠 것도 없었다. 뭔가 바쁘게 쫓아다니는 이는 오히려 경망스럽다거나 촐랑거린다고 꾸짖음을 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회사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라. 특히 아침 시간은 한마디로 전쟁이다. 일하러 가는 시간은, 칼같이 출근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초와 분을 다툰다. 반면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칼퇴근’이 어렵다.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는데 몸은 회사에 묶여 있는 인질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마음은 더 바쁘다. 아이들이나 노인 등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겹치면 마음은 너무나 급하다. 모든 바쁜 일이 끝나고 밤중에 비로소 잠자리에 누우면 ‘어휴~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살아남았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또 내일은 얼마나 바쁠까’라는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다. 그나마 다음날 무사히 일어나면 다행이다. 많은 경우 죽도록 일하다가 정말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같이 10명 가까이 산재 사망하는 통계를 목격하고 있다. 과로사도 매일 2~3명꼴이다. 공인 과로사, 이것은 공인 회계사보다 더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데도 매일 2~3건 과로사가 쌓여간다. 이것이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왜,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느긋함의 사회가 과로사의 사회로 변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하면서부터다. 농촌ㆍ농업 중심의 사회가 도시ㆍ공업 중심의 사회로, 또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이 살던 사회로부터 시장과 돈이 삶을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는 것이 그러한 변화의 본질이다. 이 변화와 더불어 시간의 개념도 변했다. 한마디로 자연의 시간으로부터 인공의 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농사를 보라. 봄이면 씨앗 뿌리고 여름이면 풀을 뽑고 가을이면 추수하고 겨울이면 쉰다. 느긋하게, 그러나 철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 자연의 시간이다. 그러나 공장을 가보라.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작업 대상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초와 분을 다투어야 한다. 옆 사람과 이야기는커녕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자연의 시간과 인공의 시간이 이렇게 대조된다.

게다가 가정은 어떠한가. 갓난아기일수록 자연의 시간에 가깝게 움직인다. 예컨대 아기는 수시로 배고픔을 느끼고 수시로 잠을 잔다. 그러나 아이가 클수록, 어른이 될 수록 인공의 시간에 맞추어진다. 아무 때나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만 밥을 먹어야 한다. 그것도 잽싸게 먹어 치우거나 값싸게 한 끼 때워야 한다. 또 설사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낮 12시만 되면 점심시간을 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 욕구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이를 건강하게 충족시키는 과정 속에서 매 순간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기보다는, 기계처럼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어쩔 수 없이 맞물려 돌아가야만 하는 그런 삶을 산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할 날이 오겠지’하는 막연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보라. 막연한 미래의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그 날’은 비로소 땅 밑에 가서야 온다. 이것이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바로 이것을 자본이 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들 대부분이 오늘의 행복을 오늘 누리기보다는 막연한 미래로 부단히 유보하면서 뼈 빠지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 축적ㆍ이윤 추구ㆍ돈벌이 시스템이 가진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 아니던가.

진정제ㆍ망각제ㆍ흥분제 역할하는 일중독

공인 과로사가 공인 회계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시대, 이건 바로 일중독(work addiction)의 결과다. 그렇다면 일중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갈수록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병적 상황이다. 흥분 속에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가슴 벅차게 새 일감을 찾는다(면역성). 일을 않고 쉬면 오히려 불안하다(금단 현상). 반면 일하는 동안에는 세상만사 모두 잊고 마음이 편하며 뿌듯하기도 하다(의존성). 삶의 의미가 일 속에, 성취 속에 있기 때문에 여가활동, 사회운동, 인간관계 따위가 경시된다. 자아 정체성을 오로지 일 속에서만 찾는 것이다. 일이 없다면 죽음이라 볼 정도다. 따라서 일중독을 정의할 때 핵심은 세 가지다.(강수돌 저 ‘일중독 벗어나기’ 참고) 첫째, 일에 대한 의존성, 둘째, 만족에 대한 면역성 증가, 셋째, 일이 없을 때 금단 현상 발생 등이다. 일중독의 발생 원인을 추적해보면 크게 두 가지 뿌리가 있다.

하나는 어릴 적부터 좌절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 좌절감ㆍ굴욕감ㆍ열등감ㆍ심적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일속에 자신을 파묻고자 하거나 의도적으로 일을 통한 성취에 목숨을 거는 경우다. 둘째는 어릴 적부터 성취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 더욱 많은 성취감ㆍ칭찬과 인정ㆍ더 많은 도취감ㆍ자아실현감을 느끼기 위해 본능적이든 의도적이든 일을 통한 성취에 인생을 거는 경우다. 따지고 보면 바로 여기서 일이란 일종의 마약의 역할을 한다. 첫째의 경우 사람들에게 일이란 진정제 내지 망각제가 된다. 둘째의 경우 일이란 흥분제다.

일중독의 정의나 발생 원인을 정리하는 가운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지는 않는지 하는 문제다. 생각건대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 내면의 참된 욕구가 건강하게 충족되지 못할 때다. 그렇다면 내면의 참된 욕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생존의 욕구와 사랑의 욕구다. 바로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삶이 아니던가. 그 중에서도 사랑의 욕구(인정과 존중, 나눔과 배려, 인간미와 공동체, 소통과 연대)가 핵심이다. 요컨대 사랑의 욕구가 건강하게 충족되지 못하면 공허함이 생긴다. 이 공허함은 고통이다. 이 고통을 회피하거나 보상하기 위해 우리는 외부에 눈을 돌린다. 그 외부가 마약이면 마약중독이 되고 게임이면 게임중독이 되며, 쇼핑이면 쇼핑중독이 된다. 앞서 말한 산업사회의 핵심은 경쟁 사회이자 능력사회, 성과사회다. 일을 통한 성취와 능력, 일을 통한 자아실현, 일을 통한 생존, 일을 통한 인정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내면의 공허함은 일을 통한 성취로 쉽게 메워지는 듯 보인다. 일중독이 발생하는 사회 심리적 메커니즘이 바로 이것이다. 한편 일중독 자체도 고통이다. 이 고통을 상쇄하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 알콜중독이나 쇼핑중독으로 확장된다. 한국 사회가 술 권하는 사회, 쇼핑 조장하는 사회로 변모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따지고 보면 가정ㆍ학교ㆍ직장ㆍ종교ㆍ시장ㆍ군대 그 어느 영역을 보더라도 내면의 공허함이 관찰된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중독적 노력, 그 중에서도 일중독ㆍ쇼핑중독ㆍ알콜중독이 쉽게 관찰된다.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일중독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하루에 30분 이상 운동을 하라 △일을 집에 갖고 가지 말라 △취미 활동을 하라 등등 이런 식이다. 물론 이런 테크닉도 중요하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자칫 이런 테크닉조차 ‘일중독적’으로 진행되기 쉽다. 바쁘게 일한 다음에 바쁘게 취미활동을 하고 바쁘게 운동을 하고 바쁘게 사람을 만나야 하는 식으로. 정말 웃기는 것은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휴가를 가서조차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하게 휴가 일정을 짜고 효율적으로 휴가소비를 하고 마지막에는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다. 둘째, 일중독이 발생하는 보다 큰 맥락 즉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일부 미시적인 테크닉으로 자기만의 비법으로 일중독을 피하려는 것은 결국 일중독 사회를 (자기도 모르게) 묵인하거나 (그래도 살 만한 것이라고) 조장하기 쉽다는 것이다.

성공ㆍ출세의 집단적 강박증에 빠진 사회

따라서 우리는 보다 큰 맥락을 짚어야 한다. 그 맥락 자체가 문제라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사회적 실천과 개인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그러면 보다 큰 맥락이란 무엇인가.

첫째, 역사적으로 우리는 이른바 외세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집단 심리를 형성하게 됐다(H. 하이데 ‘노동사회 벗어나기’ 박종철출판사 2002 참고). 외부의 폭력을 강하게 경험하는 과정에서 ‘싸울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강자 앞에 무릎 꿇고 숭배하는 심리를 온 사회가 공유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제국주의 앞에서는 제국주의를 형님이나 아버지로 모시고, 자본주의 앞에서는 자본주의를 형님이나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다. 지배 체제가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로 모시지 않으면 죽음 또는 그에 값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약자인 자신이 강자를 동일시하면서 은연중에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무시하고 짓밟게 된다는 사실이다. 적군이 아군 되고, 아군이 적군 되는 묘한 일이 생긴다. 강자의 논리를 철저히 내면화한 결과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약자-강자의 논리나 피해자-가해자의 논리를 벗어나야 할 역사적 과제를 갖는다.

둘째, 사회적으로 우리는 출세와 성공에 집단적 강박증을 갖게 됐다. 가정ㆍ학교ㆍ직장 등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강박증과 조급증에 시달린다. 더 슬픈 것은 그런 시달림조차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자 하는 집단 불감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조차 못 느끼는 경우도 많다. 가정에서는 뱃속의 아기에게조차 태교를 하는데, 심한 경우 영어나 중국어까지 가르치려 든다. 태어난 유아에게는 부모들의 성취욕을 대신 채워 달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강제한다. 아이들은 일종의 생존전략, 사랑받기 위한 전략으로 부모님의 눈치 보기를 배운다. 유치원과 학교에 가면서 성취ㆍ성과ㆍ점수 따위가 삶의 목표처럼 강제된다. 어른들이 경험하는 직장 세계가 가혹한 경쟁사회ㆍ성과사회ㆍ업적사회이기 때문에, 2세들이 미리 경쟁력을 갖도록 돕는다는 명분 아래 (의도하든 않든) 아이들에게 치열한 경쟁 논리를 강요한다.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오로지 돈 벌어 자식을 대학 보내려고 연장노동과 일중독에 빠지는 것은 답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집단적 강박증ㆍ조급증ㆍ불감증과 더불어 성공과 출세의 논리와 경쟁의 논리를 상대화해야 할 사회적 과제를 가진다. 이 두 가지의 큰 맥락을 전제한 위에서 우리는 사회적 개인적 실천을 해야 한다.

초과노동 없어도 살만한 사회는 가능하다

사회적 실천으로는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리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자연의 시간에 가까운 리듬으로 살 수 있는 사회, 내면의 참된 욕구를 건강하게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공부와 직업을 영위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차별 없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에 살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경로는 활발한 사회적 토론 속에 찾아나가야 한다. 최소한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한 몇 가지 기둥들은 여기서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2ㆍ3차 산업이 아닌 1차산업 중심의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하루 한 나절 정도의 짧은 노동시간, 초과노동 없는 기본급만으로도 충분한 생활 보장, 땅과 집, 교육과 의료 문제 공동체적 해결, (개성 있는) 고교 평준화를 넘어 대학 평준화 및 직업 평준화 실현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죽임’의 사회경제 구조가 아니라 ‘살림’의 사회경제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지향점을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 그 속에서라야 일중독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것이다.

다음으로 개인적 실천을 보자. 심리상담 차원의 해법들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매일 규칙적 운동을 하거나 명상에 잠기거나 취미 생활을 하는 개인적 해결책조차 이런 사회적 해결책의 구현과 더불어 이뤄질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 않다면 한편에서 일중독은 확산되고 심화하는데도 다른 편에서 자기만큼은 여유를 누리며 산다고 (자위하는 줄도 모르고) 결국은 자위하는 데 그치고 말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개별 가정과 학교에서는 어릴 적부터 아이들이 자신의 참된 욕구를 솔직히 표현하고 건강하게 충족하는 가운데 행복감을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것이 좌절되거나 오로지 성취욕에만 불타게 되면 이런 저런 유형의 일중독자만 양육하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또 노동 현장, 직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고달픔’에 대해 서로 숨기거나 억지로 참지 말고 모두 털어 놓고 이야기하는 풍토를 만들고, 민주 노조나 참된 노동자 소모임 등이 주체가 되어 적극 공론화해나가야 한다.

요컨대 참된 삶의 여유란 결코 하루 30분 명상과 같은 값싼 방식으로는 오지 않는다. 차라리 가정ㆍ학교ㆍ직장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 30분씩이라도 이런 근본적 문제의식을 나누는 데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생존의 욕구를 넘어 진정한 내면의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건강한 노동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몸 건강하게 노동해서 돈 잘 벌어 자식을 대학 보내는 것으로 참된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데, 그 한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