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노동자, 정작 자신의 건강권은 확보 못해”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 토론회

매일노동뉴스 부성현 기자

질병을 다루고 치료하는 의료노동자들이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에서는 타 산업에 비해 훨씬 소홀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병원경영진들의 무관심과 유해물질관리소홀 등 작업장 안전관리체계 미비가 의료노동자들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안연순 동국대 일산병원 산업의학과 교수는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가 지난 14일 개최한 ‘의료산업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토론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노동자들이 안전의식 부재와 병원 경영진들의 작업장 안전관리체계 소홀로 자신들의 건강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며 “대책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병원, 산재종합기업

안 교수는 “병원은 자본집약적이면서도 자동화가 불가능하고 인력이 많이 필요한 노동집약적 산업”이라며 “제조업과 서비스 산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산업재해 위해요인들을 갖고 있는 종합기업이지만 정작 이를 방지할 만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먼저 의료노동자 안전의식 부족의 원인을 관료적인 병원의 조직질서에서 찾았다. 안 교수에 따르면 병원은 인격적 지배보다는 형식적 규범에 의해 지배되고 상급자의 권위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특성을 지닌다. 병원은 분업화·전문화돼 있지만 최상급자가 모든 업무를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조직이다.

그는 “산업재해나 각종 불합리한 행위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도 환자의 목숨을 다루고 응급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기 일쑤”라며 “의료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인권이나 건강권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병원은 생물학적·물리적·화학적·사회심리적 등 각종 업종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해요인이 모두 발생할 수 있는 곳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세균·바이러스·진균 등 감염성 질환을 환자나 환자에게서 채취한 혈액(혹은 체액)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옮을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는 환자나 의료기구 등 중량물을 옮길 때 근골격계질환이 발생할 수 있고, 화학적으로는 항암제나 소득제 등을 다루면서 피부질환 또는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 게다가 의료노동자들은 상하 수직적인 관료질서 속에서 일하면서도 환자나 그의 가족들에게는 친절·봉사(?) 해야 하는 감정노동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사로부터 작업장 내 폭력을 당할 수도 있고, 스트레스·우울·신경정신질환 등을 앓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안 교수는 “의료노동자들은 의료 활동부터 이를 지원하기 위한 일까지 수십 가지가 넘는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산업재해를 당할 수 있는 요인들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에 대한 안전교육과 안전시설은 타 산업에 비해 매우 저조하다”고 평가했다.

작업환경측정 제대로 안 돼

지난 2005년 12월 말 현재 의료산업에는 4만9천309개 의료기관에 41만6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이 일하고 있는 직종은 의사·간호사·치위생사·물리치료사·임상병리사·방사선사 등 200여개에 달한다. 안 교수는 “전체종사자 중 여성노동자가 69.8%를 차지하고 있어 각별한 관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보건관리가 양호할 것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산업보건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2006년 보건관리 기술지원 의료기관 실태 분석결과에 따르면 의료기관의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진단 실시율은 각각 56.7%와 65.5%로, 전산업 평균실시율 98.1%와 96.8%에 비해 매우 저조했다. 보건교육 실시율(43.3%)과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조사 실시율( 53.3%), 유해작업자 보호구 지급률(37.9%) 등 각종 보건관리에서도 취약한 실정을 드러냈다.

또 한국노총의 의뢰로 에이렉 컨설팅의 김강윤 박사가 감염관리를 위해 국내 6개 의료기관의 26개 생물안전작업대(BSC) 성능 실태조사를 벌여 이날 토론회에서 밝힌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기구에서 유해물질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물안전작업대는 주로 실험이나 치료에 필요한 미생물·항암제·결핵균 등을 다룰 때 쓰는 기구로 해당물질이 누출될 경우 공기를 통해 인체에 감염돼 발암성·변이원성·생식기계 장해 및 결핵을 일으킬 수도 있다.

김 박사는 “생물안전작업대 생산기준과 작업관리기준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으면서 유해물질을 내보내는 풍속도 일정치 않고 대부분의 기구에서 실험물질이 누출되고 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에는 환경에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보호구에 대해서도 “보호구 생산기준이 남성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성의 50% 정도는 보호구의 밀착성 등에서 불합격판정을 받고 있다”며 “이 문제 역시 앞으로 시정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의료노동자에게 맞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필요

이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박수호 연세의료원노조 정책부장은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조업이나 건설업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보니 의료노동자들의 실태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제대로 적용되지도 않고 있다”며 “시행규칙이나 규정 등을 수정해 의료업종에 맞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생물안전작업대와 관련해서는 “실태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실제 현장에서는 별도의 관리지침이 없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기기를 관리하고 있다”며 “이번 조사를 토대로 안전지침을 만들고 이를 적용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남구 경총 책임전문위원은 “의료노동자들의 산업재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의료노동자들이 (제조업노동자들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업환경 개선 등으로 해결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임 위원은 “먼저 병원경영진과 노동자들의 산업안전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촉구하는 한편 “작업조직·체계 개선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치년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의료인들이 질병에 대해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산업안전이나 자신의 건강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며 “자체 교육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병원은 병균이나 이를 치료할 때 필요한 온갖 유해물질을 다루는 곳이지만, 실제 이런 병균이나 유해물질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노출평가기준을 강화하고 각 물질의 유출입을 관리할 전문가를 상시적으로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재심 울산대 서울아산병원 교수도 “생물학적 유해요인은 예방접종과 항체투입을 통해 사전예방이 가능하지만 병원이 자체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문제로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산재가 발생한 후에는 산재보험에서 치료비용이 지불되는데, 치료보다 더 중요한 예방에 대해서도 비용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선아 노동부 산업보건환경팀 전문위원은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의료노동자들이 산업안전보건법을 제대로 모르고 경영진들 또한 이를 제대로 준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가장 먼저 현행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교육과 점검을 동시해 진행하고, 그 외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의견정취와 연구 등을 통해 해결책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정혜선 한국간호협회 교수는 “제조업의 산재보험법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료산재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연구와 문제제기를 하면서 완성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각 의료기관이 안전보건위원회를 설치해 스스로 안전관리를 위한 시스템을 갖춰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