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지금, 여기] 공리주의 수난시대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 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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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벤져스> 시리즈의 악당 타노스는 독특한 존재였다. 그전까지 영화 속 악당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인자가 되겠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히거나 파괴적 복수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반면 타노스는 자신의 영광이나 복수, 눈먼 파괴욕이 아니라 전체 우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악당이었다. 자원은 점차 줄어드는데 이렇게 인구가 늘어간다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맞이하리라. 그는 고심 끝에 우주 인구의 절반을 랜덤하고 공평하게, 순식간에 날려버린다.

그는 대업을 이룬 후에도 왕관을 쓰고 권력을 휘두르기는커녕, 귀촌하여 텃밭을 가꾸며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과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만을 묵묵히 추구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자의 풍모였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이제 생존자들은 더욱 풍요로운 환경에서 ‘복리가 증진된’ 삶을 살아가야 했지만, 웬걸 온 우주는 슬픔과 허무에 휩싸인다.

영화 속 악당 캐릭터 묘사에나 쓰일 줄 알았던 일차원적 공리주의 주장을 현실에서 마주치고 적잖이 당황했다. 집권여당 대표는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 시위대에 소수의 이익을 위해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신호탄이었는지, 비슷한 주장들이 뒤를 이었다. ‘소수’ 장애인들이 자신만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기업 불매운동 비판에도 공리주의가 등장했다.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SPC 불매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민주노총 조합원 200여명에게만 행복이고 가맹점주, 한국노총 소속 제빵기사, 기업 임직원 등 2만7400여명에게 고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난감하다. 이들의 논리가 너무 완벽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지혜와 숙고의 역사가 있는데, 대체 어느 시점까지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공리주의는 당대의 사회규범과 도덕체계에 혁신을 가져온 진보적 사상이었다. 나의 행복과 복지의 중요성이 어떤 타인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복지가 동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왕이나 귀족, 주교의 이익을 농민, 노동자, 상인의 그것과 다르게 취급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헤아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는 이 사상은 자유주의, 복지국가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고전적’ 공리주의는 이후 여러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는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다수의 복지, 사회적 총합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며, 총합에만 집중할 뿐 불평등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공리주의 같은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절차적 정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강조한 존 롤스는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라 해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 혹은 폐기되어야 하며,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인권 개념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 자체에 초점을 두면서 이것이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인류가 참혹한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면서 합의에 이른 뼈아픈 교훈이었다.

현실적인 자원의 제약, 만연한 불평등 속에서 인류는 어떻게 하면 더욱 공정하게 자원을 배분하고 정의로운 제도를 구축하며 인간 복지를 증진시킬 것인지, 숙고하고 실패하고 전진하기를 거듭해왔다.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잖아요, 인류는 인권이라는 개념에 합의했어요. 인권이 뭐냐 하면요” 설명해야 한다니, 어쩐지 그동안 애쓰신 인류 조상님들 뵐 낯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