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한미FTA] 스위스 협정추진을 보류하다

[한겨레 2006-06-04 20:06]

[한겨레] [한-미 FTA 집중탐구: 1부-다른 나라에서 배운다]
스위스 협정추진을 보류하다

‘협정 보류’ 배경엔 ‘국민투표제’ 있었다

한국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공식 표명한 지난 2월 초, 스위스는 미국과의 협정 추진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길을 간 셈이다.

스위스의 경제 중심 도시 취리히의 ‘파라데 플라츠’ 광장. 여러 노선의 트램(경전철)을 타고 내리는 시민들 뒤로 스위스 1, 2위 은행인 스위스연방은행(UBS)과 크레디트스위스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파라데 플라츠는 금융강국 스위스와 개방경제 스위스의 상징이다. 스위스연방은행은 자산규모로 보면 2004년 기준 1조5330억달러로 세계 1위다.

스위스와 한국은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스위스는 한국처럼 무역의존도가 높다. 한국이 70%인데 스위스는 77%다. 대미 의존도도 비슷하다. 한국의 수출 대상 1위는 중국이고 다음이 미국이다. 스위스 또한 독일에 이어 미국이 2위다. 농업이 취약하다는 공통점도 있다. 한국과 스위스 둘다 이른바 G10(농업협상 때 같은 목소리를 내는 농산물 주요 수입국 10개 나라) 그룹의 회원이다.

스위스로 취재를 떠나기 전 한국의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과 스위스는 인구나 경제규모, 교역구조가 달라 비교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위스의 사정을 들여다보니 정부 관계자들의 이런 설명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멕시코 캐나다 칠레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등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들과 우리를 비교할까. 이들 나라 대부분은 교역구조상 농업 강국이다. 인구나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칠레나 싱가포르를 우리와 비교하는 것도 어색하다.

스위스도 한국처럼 기업인들과 정부가 협정 추진에 적극적이었다. 스위스의 상공인단체 ‘이코노미스위스’는 “미국이 유럽지역과는 협정이 없어 유럽에 교두보를 필요로 한다”며 “다른 나라보다 먼저 미국과 협정을 맺을수록 얻는 게 많다”고 주장했다. “2007년 7월이면 미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신속협상권(TPA)이 소멸되므로 서둘러야 한다”라는 주장도 했다.

스위스 행정수도 베른에서 만난 크리스티안 에터 경제부 양자통상국장은 “2004년 11월 게르버 경제부 통상담당 차관이 워싱턴에 가서 협정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들으면서 양국 간 논의가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스위스 정부가 미국에 있는 국제경제연구소(IIE)에 용역을 맡겨 2005년 9월에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스위스는 미국과의 협정으로 대미수출이 40% 늘면서 국내총생산이 0.5% 증가하는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는 미국과의 견해 차를 좁히지 못했다. 에터 국장은 “2005년 9월부터 2006년 1월까지 화상회의를 포함해 10여 차례 만났지만 결국 농업에서의 이견을 좁히기 어렵다고 보고 협정 추진을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크게 15가지 이슈 중 나머지는 합의점이 보였는데 농업의 개방방식과 유전자조작식품(GMO)의 표시 등 두 가지를 놓고는 평행선을 달렸다”고 덧붙였다.

농산물 문제에서 스위스는 협정에서 언급한 것만 개방하려 했지만, 미국은 모두 개방하고 일부만 예외로 하자고 맞섰다. 유전자조작식품의 경우 스위스는 식별이 가능하도록 포장지 등에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반대했다.

유전자조작식품 표시 문제로 양국이 줄다리기를 하던 지난해 11월 스위스에서는 마침 유전자조작 동·식물의 국내 사육·재배를 허용하느냐를 놓고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스위스 농민·환경단체가 국민발의 절차를 이용해 ‘추가로 5년간 허용 유예’를 국민투표에 부친 것이다. 결과는 행정부와 의회의 바람과 달리 투표자의 56%가 추가 유예에 찬성했다.

하이디 브라보 스위스농민연맹 홍보국장은 “국민의 20%만 당장 도입을 원했다”며 “미국이 주도하는 유전자조작식품의 확산을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부가 확실히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해당 조항을 절대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스위스가 양보하려 해도 국민투표가 버티고 있었다”며 “정부가 협상 결렬을 선택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고 덧붙였다.

스위스와 한국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국민발의제였다. 한국도 국민투표제가 있다. 하지만 국회가 의결한 헌법개정안이나 대통령이 국민투표에 부친 안건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스위스는 일반시민도 국정 현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 있다.

스위스는 미국과 협정을 타진하거나 체결한 어느 나라 못지 않게 한국과 교역구조가 유사했다. 그리고 한국과 비슷하게 시한에 쫓기며 협상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과 기회의 폭이 달랐다.

취리히·베른/송창석 기자 number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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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명 서명 받으면 누구나 국민투표 발의

브레이크. 스위스에서는 국민투표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의회나 행정부가 채택한 법안을 시민들이 차단하거나 지연시키는 제동장치의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국민발의제가 있어 시민이 원한다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 법령이 공포된 지 100일 이내에 5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된다.

스위스연방 차원만이 아니다. 스위스는 26개 주가 있는데 대부분의 주에서도 주 차원에서 주민발의제와 주민투표제가 있다. 글라루스주와 아펜첼주는 인구가 적어 주민들이 다 모여 거수로 투표하기도 한다.

스위스는 연방의회에서 4년 임기로 뽑힌 7명의 각료가 연방각의를 구성한다. 연방각의 각료들이 해마다 1명씩 돌아가며 대통령이 돼 연방각의를 주재하고 대외적으로 나라를 대표한다. 연방각의가 중요정책을 입안하면 의회에 안건이 제출되는데 상원과 하원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스위스는 중요 현안의 경우 또다시 국민투표가 버티고 있다. 스위스 경제부 양자통상국의 아시아 담당자 파트리크 질테너는 “모든 절차를 통과하려면 일러야 2년이 걸린다”며 “미국과의 협정을 보류한 이유로 미국의 신속협상권 시한에 맞추기에는 이견이 컸다고 말한 것도 그런 뜻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송창석 기자

인터뷰/ 토마스 플레처 스위스 상공인단체 홍보이사
“경제 성장해도 농업타격 심각…양보다 질 선택”

이코노미스위스의 토마스 플레처(사진) 홍보이사는 스위스 정부의 미국과의 협정 보류 결정에 대해 “양보다는 질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위스는 농업을 제외하고 제조업은 물론 은행·보험 등 서비스업까지 아우른 3만개 기업을 회원사로 둔 스위스 최대 상공인단체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찬성한 이유는?

=스위스는 수출에 중점을 둔다. 미국은 유럽연합 다음으로 큰 경제 파트너다. 미국과의 협정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또 언젠가는 유럽연합과 미국이 협정을 맺을텐데 스위스가 그 뒤에 하면 이니셔티브가 없다. 먼저 해야 이익을 더 챙길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된 이유는 농업 때문인가?

=우선 농업이 죽는다는 우려가 있었다. 둘째 미국에서 데드라인을 설정했다. 스위스 시스템은 그 시한에 맞출 수 없다. 세번째는 스위스 안에서도 미국과의 협정보다 유럽연합에 먼저 가입하자는 분위기 있었다. 연방의회의 4분의 1정도가 그랬다.

-농업이 희생된다고 해도 비중은 아주 작지 않은가.

=경제 전체로는 미국과 협정을 맺으면 몇 퍼센트 성장하겠지만 농업에서 몇십 퍼센트 큰 타격이 올 수 있다. 그게 문제였다. 양과 질의 차이다. 스위스 정부는 숫자보다 전체적인 질을 택했다. 특히 농업은 먹거리 생산에 그치지 않는다. 환경과 자연경관 등 나라의 이미지를 가꾸고 있다.

-정부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려웠을텐데.

=어느 때보다 미국과 협정을 맺기 좋은 기회였다. 결렬되자 이에 반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에서 결정한 만큼 당분간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농업도 조금씩 문을 열고 있다.

취리히/송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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